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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 강릉
    일탈/가보고 싶은 곳 2009. 8. 29. 13:28

     

     

    어느새 성큼, 가을입니다. 들녘에선 이미 가을걷이가 한창이었고, 자동차가 미치지 못하는 공터 마다에는 멍석 위로 널어

    놓은 낱알들이 가을 햇살에 몸을 뒤척이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변색을 시작한 은행나무 아래로는 꽃을 활짝 피운 코스모

    스들이 줄을 맞춘 채 도열해 온몸으로 가을의 전령을 맞이하고 있었고, 기세가 등등한 점령군들은 이제 곧 세상을 자신만의

     

    색깔로 바꿔놓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가을의 조짐은 경포에서도 충분히 감지되었습니다. 지난 여름의 혼돈과 번잡을

    뒤로하고 조용하게 물러앉은 바닷가에는 신산스런 가을 바람만 횡횡해 쓸쓸함을

    더했고, 기억하기 싫은 광란의 흔적들은 모래사장 곳곳에 흔적을 남기며 아픈

     

    상처로 잔존하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철없는 아이 녀석들의

    환호성이나 나이 어린 연인들의 호들갑 정도가, 계절의 변화완 상관없이 삶에 활력

    을 주는 신선함으로 넘쳐나며 거친 파도를 밀어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바다가

     

    인간에게 주는 감성은 대개 비슷한가 봅니다. 하늘과 맞닿은, 끝이 안 보이는 어딘가에서부터 밀려와 종국에는 아이 녀석의

    발목이나 간지럽히다가 사그러들고 마는 그 바다. 누구는 그 바다를 보며 인생의 회한을 얘기합니다. 파도가 철썩이는 모래

    사장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는 예정하기 힘든 인연을, 삶과 죽음과 희망과 절망을 노래합니다. 버리고 싶은 아픈 기억,

     

    되찾고 싶은 삶의 활력, 더러는 하찮은 인연의 끈마저 놓아버리고 바다와 하나되고 싶은 허한 갈망…. 거대한 자연 앞에서,

    거칠 것 없는 파도의 기세등등함 앞에서, 인간은 모두가 똑같은 크기로 졸아들며 가을 속으로 침잠해들고 있었습니다.

     

    ♣ 닫힌 듯 열린 개방의 미학

    그렇게, 가을의 문턱에서 맞닥뜨린 강릉엔 그러나, 한여름의 열기와는 거리가 먼 평상심만

    가득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경포호 주변을 도는 연인들의 얼굴에서도, 아이의 손을 잡고

    바닷가 모래사장을 산책하는 부부의 뒷모습에서도, 심지어는 결혼식을 마치고 뒤풀이를

     

    나온 신혼부부의 들뜬 어깻짓에서도, 그 흔한 욕망의 흔적은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았습니

    다. 실상 강릉은 여름 한철의 번잡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유교문화의 본향입니다.

    그곳엔 충절이 있고 지조가 있고 기개가 넘쳐납니다. 태백산맥이라는 험산준령으로 인해 다소간 홀대도 받았지만, 덕분에 이

     

    지방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양산해내기도 했습니다. 강릉을 대표하기는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오죽헌이지만, 배다리의 선교

    장은 그 규모나 형식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빼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전주 이씨가(家) 저택 중의 하나인

    이곳엔 조선조 양반 문화의 형식과 권위가 깔려 있기도 하지만, 여타 양반가와는 다른 자유롭고 활달한 여유와 풍취가 배어난

    다는 소릴 듣기도 합니다.

     

    수십 평에 달하는 공간에 인공 연못을 파고 그 위에 지어놓은 활래정은 사방에 벽이 하나도 없는

    자유분방함과 개방성의 묘미를 한껏 살린 정자문화의 백미로 손꼽힙니다. 특히 이곳의 행랑채는

    사랑으로 통하는 솟을 대문과 안채로 통하는 중대문이 나란히 자리한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기

     

    합니다. 높은 기단 위에 다소 위압적으로 자리잡은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도 선교장을 대표하는

    구조물 중의 하나입니다. 연못에 심어놓은 연꽃들이 만개할 때는 선계가 따로 없다는 것이 선교장

    앞에서 참방짜 수저를 만들고 있는 김영락 씨의 전언입니다. 선교장 이씨가의 세도와 위세를 단적

     

    으로 보여주는 십여 칸이 넘는 행랑채도 보는 이를 압도하며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선교장

    을 처음 지은 이내번의 후손으로 ‘안빈낙도’를 신조로 삼았던 오은처사 이후가 지은 것으로, 열화당

    이란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도연명은 귀거래사에서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다시 벼슬을 어찌 구할 것인가. 친척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를 쓸어버리리라”고 했는데, 마치 열화당을 염두에 두고 읊었다는 생각마저 듭니

    다. 열화당에 앉아 안빈낙도하며 세상을 관조하는 재미 또한 각별했을 듯 합니다.

     

    ♣ 한 발 물러서서 보는 여유

    자연이 주는 풍취를 가장 잘 살린 볼거리들이 많기로는 단연 경포호 주변입니다. 사람들은 바다를

    보고 싶은 욕심에 눈이 멀어 길가에 오롯하게 자리한 경포대며 방해정, 경호정, 금란정, 호해정, 해

    운정 같은 열두 곳의 누정은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그리하여 경포대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경포팔경(경포대에서 보는 해돋이와 낙조와 달맞이, 고기잡이배의 야경, 노송에 들어앉은 강문동, 초당마을에서 피워올리는

    저녁 연기 등)을 놓치는 우를 범하고 마는 것입니다.

     

                                                                                                                                                 기아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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