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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천택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4. 8. 08:23

    綠耳 霜蹄 櫪上에서 늙고 龍泉雪岳 匣裡에 운다

    平生의 먹은 뜻을 속절업시 못 일우고

    귀밋티 흰 털이 날나니 글을 설워하노라

                                 ~김천택(金天澤)~

    <해설>

    하루에 천 리나 달리는 녹의 상제 같은 준마도 외양간에 매인 채

    늙어버리고 용천 설악의 잘 드는 칼도 갑속에 들어만 있어, 한 번

    써보지도 못한 채 세월만 흘러감을 슬퍼하노라 한 평생 품어 온

    뜻을 헛되이 이루지 못하고 귀 밑에 백발만이 점점 늘어서 흩날리니 

    이 일을 설워하노라.


    ◈ 배경

    김천택은 영조 때의 시조작가이며 자는 백함(佰涵)이고 호는 남파(南坡)이다.

    숙종 때 포도청의 포교로 있었으며 창극에 뛰어난 명인이었다. 영조 3년 몸소

    시조집을 엮었는데 이것이 청구영언(靑丘永言)이다. 그의 시조는 현재 57수가

     

    전하지만 노가재(老歌齋) 김수장(金壽長)과 남파는 시조 부흥운동에 중심적 역

    할을 담당했다. 홍봉한(洪鳳漢;1713~1778)은 본관이 풍산이고 자는 익여(翼汝)

    인데 호는 익익재(翼翼齋)이다. 음(蔭)으로 참봉, 세마 등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영조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육조 판서를 거쳐 인조 33년 정승이 되고 마침내

    영의정까지 올랐었다. 특히 그의 딸이 장헌세자의 빈이 되어 그 권세와 귀함이

    말없이 높았다. 그런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오라버니 김구주(金龜柱)와 권

     

    력 다툼을 벌였으며 홍봉한에 가담한 자를 ‘시파(時派)’ 김구주에 가담한 자를

    ‘벽파(僻派’라고 불렀다. 김구주는 영조의 국구 김한구의 아들로서 본관은 경주

    인데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어 이름이 높았다. 그런데 그이 누이가 영조비로

     

    간택되자 차츰 사람이 교만하고 방자하기 시작하여 나이 20에 벼슬을 하고 대궐

    에도 수시 드나들게 되었다. 이때 친하게 된 것이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 겅

    후겸(鄭厚謙)이었다. 또 김구주의 숙부인 김한록(金漢錄)은 한원진(韓元震)의 문

     

    하에서 배웠는데 동문인 홍경해(洪景海)와 친했다. 형님인 한구가 부원군이 되자

    도 이학(理學)으로서 벼슬을 얻었고 당시의 대신 김상로(金尙魯)와 신만(申晩)

    등이 그와 가까워졌다. 이들은 세자의 행상(行狀)이 온당치 못함을 기화로 없는

     

    사실까지도 지어내어 소문으로 퍼뜨렸다. 이때 영조께서는 이미 노령이시고 자주

    병석에 눕고 있었으므로 과연 어느 쪽을 편들어야 좋을지 번민이 많았다 그러나

    마침내 단을 내려 영조 38년 세자를 잡아 뒤주 속에 가두고 장차 죽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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