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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보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4. 5. 21:29
胸中에 불이 나니 五臟이 다 타간다
神農氏 꿈에 보와 불 끌 藥 무러보니
忠節과 慷慨로 난 불이니 끌 藥 업다 하드라
~박태보(朴泰輔;1654~1689)~
<해설>
가슴 속에 불덩어리가 있어 오장육부가 모두 탄다. 꿈에 신농씨를
만났기에 가슴 속의 이 불을 끌 약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충성
어린 절개와 세상 일을 슬퍼하는 데서 생긴 병이니 세상이 바로
잡혀지지 않는 한 그 불을 끌 약은 없다고 하더라.
◈ 배경
박태보는 본관은 반남으로서 자는 사지(士之)이고 호는 정재(定齋)인데 실학파 학자
박세당(朴世堂)의 아들이다. 서계 박세당의 형님인 백석(白石) 태유(泰維)도 학자고
특히 글씨를 잘 썼다. 백석은 자를 사안(士安)이라 했는데 19세에 진사가 되어 태능
참봉으로 있다가 숙종 7년 알성시 제 2인으로서 급제하였으며 검열, 시교, 병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그는 사람됨이 분명한 것이 온화했고 염결공신(廉潔恭愼)하여 평소
에 허튼 소리나 노하는 빛을 띠지 않았다. 글씨를 천재로 타고나 절로 터득한 바 있었
으며 그의 용필은 骨肉相爭 砥潤有光이었다. 무릇 조선조 초 글씨를 배우는 자로서
모두 조송설(趙松雪)을 주로 쳤으며 다시 한석봉을 즐겨 본받았는데, 백석이 비로소
안진경의 글씨를 얻어 이를 본받았으므로 일시에 그 글씨체가 각광을 받았다고 한다.
정재 박태보는 숙종 3년 알성시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수찬, 이천현감(伊川縣監),
이조좌랑을 역임하고 암행어사로서 호남을 안찰한 일이 있었다. 이어 응교(應敎)를
거쳐 파주목사가 되었다. 이때 숙종이 장희빈(張嬉嬪)의 무고를 곧이 듣고 인현왕
후를 몰아내고자 할 때 판서 오두인(吳斗寅), 이세화(李世華) 등과 이를 간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혹독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도중 과천(果川)에서 죽으니 향년
36세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선비들이 통곡치 않은 자가 없었다. 뒷날 사당을 노
량(露梁)과 이파(伊派)의 두 읍에 세우고 그 유덕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