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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낭원군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4. 5. 19:15

    어버이 날 나흐셔 어딜과뎌 길너내니

    이 두 분 아니시면 내 몸 나서 어딜소냐

    아마도 至極한 恩德을 못내 갑하 하노라

                       ~낭원군(郎元君;1640~1666)~

    <해설>

    어버이께서 나를 낳으시어 어진 사람 만들고자 길러 내시니

    만일 이 어버이 두 분 아니시면 이내 몸이 세상에 나와 어진

    사람이 될 수가 있을까보냐?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의 지극한

    다함이 없는 은덕을 못다 갚을까 하노라.


    ◈ 배경

    남원군은 이름은 간(侃)이고 자는 화숙(和淑)이며 호는 최락동(最樂堂)이다. 인흥군의 둘째 아들로

    효종의 당숙이다. 시조 30수가 전하고 있다. 서인 중에서 노론과 소론의 두 파가 갈라졌고, 노론의

    영수는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인데, 소론은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이 영수였다.

     

    윤증은 본관이 파평이고 자는 자인(子仁)이다. 그의 조부 윤황(尹煌;1571~1639)은 자를 덕요(德耀),

    호는 팔송(八松)인데 우계 성혼의 사위였다. 선조 34년 알성시 을과 1인으로 급제하여 숭문정자가

    되고 형조자랑, 수원판관이 되었는데 인조반정 후 장령, 이조 참의를 거쳐 전주윤이 되었다.

     

    이괄의 난 때에는 검찰사 이귀가 도망쳤으므로 이를 탄핵했고 평안관찰사 윤선(尹瑄)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 그 죄를 물어 참형에 처했다. 인조 5년 정묘호란 때 조정에서 화의를 하자 팔송은 이를 맹렬히

    반대하고 주화파(主和派)와 항장(降將) 강홍립(姜弘立) 등을 처벌하자고 하였다. 인조 15년에는 화의,

     

    즉 항복이라 하여 척화를 주장했으므로 왕이 대노하여 옥에 가두고자 했으나 뭇 신하가 간하여 겨우

    투옥만은 모면하였다. 이어 청음 김상헌, 동계(桐溪) 정온(鄭薀) 등이 척화신으로 자수한다 하므로

    그도 상서하여 스스로 연행될 것을 바랐으나 갑자기 쓰러져 사망하였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강직한

     

    성격이었다고 하겠다. 팔송 윤황의 아들인 순거(1310~1669)는 자를 길보(吉甫)라 하고 호는 미촌(美村),

    또는 산천재(山泉齋)이다. 그는 일찍 신독재 김집의 문하에 드나들며 의문에 대해서 질의하였고 인조 11년

    생원, 진사에 올라 반궁(泮宮; 국학과 향사를 익히게 하던 곳)에 드나들었다. 나라에서는 유일(遺逸)로서

     

    형조좌랑, 사헌부 지평, 장령 등의 벼슬로 불렀으나 모두 불응 했다. 인조 14년 청(靑)이 황제를 칭하고

    사신을 보내오자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그 사신을 참하고자 청했으며, 겨울 12월 청병이 대거 침공하자

    모당과 가족들과 더불어 강화로 피난했는데 강화성이 함락되자 많은 사람들이 순절하였다. 미촌은 이때

     

    죽지 못한 것을 언제나 부끄럽게 여기고 과거를 단념했으며 두문불출 했다. 명재 윤증은 미촌의 아들로서

    탄옹(炭翁) 권사(權禗)는 장인이었다. 명재는 애당초 탄옹에게 글을 배웠고 다시 신독재 김집에게서 배우고

    성리학을 유계(兪棨)에게서 배우고 우암 송시열에게서도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명재가 아버지 미촌의

     

    묘비문을 우암에게 부탁하였는데 그 비문이 말썽이 되었다. 우암은 다시 말해서 비문을 지을 때 병자호란

    당시 미촌이 구구한 목숨을 살아 강화성에서 빠져 나왔다는 사실과 어머니 이씨부인이 오랑캐의 욕을

    당하고 자결했다는 내용을 그대로 썼던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수많은 양가집 부녀가 청병의 겁탈을 당한

     

    일이 있거니와, 인조는 특별히 교서를 내려 일체 불문에 붙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윤증은 이 비문을 읽고서

    격분하고 우암과의 사제의 의를 끊어버렸다. 이것이 노론과 소론이 갈라진 직접원인이었다. 윤증은

    이 사실을 언제나 한탄하여 일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현종이 연신 유일로서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고

     

    이조참판, 공조와 이조판서, 대사헌, 좌참찬, 우의정 등으로 불렀으나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조선조

    5백년의 역사를 통하여 임금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정승의 지위까지 오른 것은 명재뿐이었으리라. 어쨌든

    노론과 소론의 논쟁이 쉴 새 없이 계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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