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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백년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4. 5. 20:01

    靑春에 곱던 양자 님으뢰야 도 늙거다

    이제 님이 보면 날인 줄 아르실가

    진실로 날인 줄 아라 보면 고대 죽다 셜우랴

                           ~강백년(姜栢年;1603~1681)~

    <해설>

    청춘에 곱던 얼굴이 임으로 말미암아 다 늙었다. 이제 와 임이 보시면

    나인 줄 알으실까? 진실로 나인 줄 임이 알아만 보신다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고 한들 무엇이 설워울 것이 있겠는가.


    ◈ 배경

    강백년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숙구(叔久)인데 호는 설봉(雪峯) 또는 한계(閑

    溪)이다. 인조 5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는데 청백하기로

    이름이 난 사람이다. 만년에는 스스로 한계라 칭하고 고금의 좋은 말, 아름다운

     

    말, 어진 정사를 모아 ‘한계만록’이란 것을 저술하였다. 숙종 7년 향년 79세로

    일생을 마치니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효종께서 재위 10년 만에 승하

    하니 수가 41세였다. 영능(寧陵=여주)에 모셨는데 1남 7녀가 있었다. 효종이 승

     

    하하자 이른바 복상(服喪) 문제로 당쟁이 일어났다. 즉 조대비의 복을 대공(大功

    =9개월)으로 하느냐 기년(朞年=1년)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효종의 어머니

    조대비는 한원부원군(漢源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이다. 노론인 우암 송시열

     

    은 대공을 주장하였는데 남인 허록, 윤선도, 조경(趙絅) 남천한(南天漢;1607~?)

    등은 기년을 주장했다. 이 중에서 조경(1586~1669)은 본관이 한양이고 자를 일

    장(日章)이라 하고 호는 용주(龍州)이다. 광해주 4년 진사로 올랐고 유일로서 추

     

    천되었으나 일어나지 않았고 인조반정 후 한 때 형조좌랑, 목천현감을 지낸 일이

    있었다. 인조 4년 친시(親試)에 장원급제하고 대사헌, 대제학, 이조참판을 거처 

    벼슬이 이조판서,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인조 15년 척화파 10명의 죄를 논할 때

     

    그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의 도승지 이경석(李景奭)이 적극 상소하여 “경은

    착한 사람입니다. 그를 벌하면 인심이 불복할 것입니다“하여 왕이 용서해 주었다.

    인조 21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갔다 왔고 효종 2년 청나라 사신의 사문사건(査問事

     

    件)으로 영의정 이경석과 함께 귀양 갔다가 특사를 받기도 했다. 또 남천한은 본관이

    영양(英陽)이고 자는 장자(章字)인데 호는 고암(孤巖)이다. 인조 8년 사마(司馬)에

    들고 동 24년 문과에 올라 승지를 거쳐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때 민신(閔愼)

     

    이란 사람이 아버지가 병이 있다 하여 조부상에 대신 복을 입은 일이 있었는데 이것

    을 맹렬히 규탄했다. 더구나 이 편의적인 복상을 우암이 가르쳐 주었다 하여 그를

    맹렬히 공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조대비 복상 문제는 노론의 승리로 돌아남인

    은 관직에서 추방되거나 귀양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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