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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진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4. 6. 12:04

    壁上에 돗은 柯枝 孤竹君의 二子로다

    首陽山 어듸 두고 半壁에 와 걸렸는다

    이제는 周武王 업쓴이 함아 난들 엇더리

                          ~이화진(李華鎭;1626~1696)~

    <해설>

    절벽 위에 돋은 저 나뭇가지는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설 때

    은나라에 대한 절개를 죽음으로서 지킨 고죽군의 두 아들, 백이와

    숙제일 것이다. 그건 그렇다 하고 수양산을 어찌하고서 여기 바위에

    돋아나 있는가, 이제는 은나라를 치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도 죽고

    없으니 다시 살아난들 좋지 않은가.


    ◈ 배경

    이화진은 자는 자서(子西)이고 호는 묵졸재(黙拙齋)인데 현종 14년에 문과에 급제

    하여 숙종 3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저서로 묵졸재집이 전한다.

    현종은 재위 15년으로 승하했는데 수가 34세였다. 이어 원자(元子)이신 순(淳)이

     

    즉위하였는데 이분이 숙종대왕이다. 숙종은 즉위하자 사람들을 보내어 우선 김우명

    의 죄를 억울하다 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대신들을 꾸짖어 복창군과

    복선군의 죄를 다스리게 하니, 비로소 정과 진이 모두 귀양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어 숙종 5년 대왕이 얘기책을 읽다가 비로소 ‘단종’에 대한 비극을 알고 단종을

    복위(復位)해줌과 동시에 성삼문 등 사육신에 대한 사당을 짓게 하고 그들의 충의

    심을 기려 주었던 것이었다. 숙종 6년 이른바 ‘경신의 옥사’가 일어났다. 그것은

     

    귀양 갔던 복창군과 복선군이 모반한다 하고서 노론이 남인을 몰아낸 사건이다.

    김석주(金錫冑;1634~1684)의 자는 사백(斯百)이고 호는 식암(息菴)인데 청릉부

    원군 김좌명의 아들이다. 효종 8년 진사에 들고 현종 4년 문과에 급제했는데 그 문

     

    명(文名)이 당세(當世)에 으뜸이었다. 전적에서 옥당에 선입되고 우승지로서 숙종조

    초기 수어사에 올랐는데 이어 도승지, 이조참판, 부제학을 역임하고 병조판서로서

    대제학을 겸했다. 이때 영의정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복창군 등과 역모를

     

    꾀 한다고 고변했으므로 청성부원군에다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올랐던 것이다.

    허적은 남인으로서 노론인 김석주 등이 먹어 대었던 것이다. 허적(1610~1680)은

    본관이 양천이고 자는 여거(汝車)이며 호는 묵재(黙齋) 또는 휴옹(休翁)이라 한다.

     

    인조 11년 생원, 진사에 올라 효종 원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벼슬이 차츰 올라

    평안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현종 9년 우의정이 되고 동 14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

    정이 되었던 것이다. 경신의 옥사가 일어나자 묵재는 고향으로 추방되었다가 결국

     

    사약이 내려져 죽었다. 허견을 비롯한 복창군 등이 죽음을 당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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