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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선도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4. 4. 16:53

    곳츤 므슨 일로 픠여서 수이 디고

    풀은 어이 하야 프르는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티 아닐손 바희 뿐인가 하노라

                       

    <해설>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곧 쉽게 져버리고 풀은 또 어이하여

    푸르듯 하다가 잠깐 동안에 누르러 버리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두고두고 언제나 편하지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싶다.


    나모도 아닌 거시 풀도 아닌 거시

    곳기는 뉘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는다

    뎌러코 사시에 푸르니 그를 됴하하노라


    <해설>

    나무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해서 또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몹시도

    곧으며 속도 텅 비웠구나. 누가 시켜서 그렇게 곧으며 속은 왜 또

    비웠는가? 저러하고 춘하추동 늘 푸르고 있으니 그것을 나는 좋아하노라.


    보리밥 풋나물을 알마초 먹은 후에

    바회 끗 물가의 슬카장 노니논라

    그남아 녀나믄 일이야 부를 줄이 이시랴

                       ~윤선도(尹善道;1587~1671)~

    <해설>

    보리밥에 풋나물을 알맞게시리 먹은 뒤에 바위끈 물가에서 실컷 노닐며

    지낸다. 그밖의 다른 일이야 부러울 것이 또 있겠는가?


    ◈ 배경

    윤선도는 본관이 해남으로서 자는 약이(約而)이고 호는 고산(孤山 ) 또는 어초은사

    (漁樵隱士)라고 한다. 고산은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광해군 때 진사과에 들고 인조

    11년 문과에 급제했다. 광해군 때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 등의 전정(專政)을 포위

     

    한사(布衣寒士)로서 탄핵하는 상서를 올렸다가 경원(慶源)에 귀양 가기도 했었다.

    1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 끝에 인조반정으로 풀려났고 금오랑으로 특별히 불렀으너

    사양하고 해남에서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인조 6년 조정에 소환되어 봉림과 임평

     

    대군의 사부가 되었고 13년에는 호조정량, 한성부윤을 거쳐 다시 벼슬을 내놓고

    해남에 돌아가 자연과 벗하며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수군을 독촉하며 강화

    도로 향했는데 도중 강화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배를 돌려 제주도를 바라고 돌

     

    아가다가 보길도(甫吉島)를 지나게 되었다. 그리고 수려한 풍경에 마음이 이끌려 부

    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그곳을 종생(終生)의 곳으로 삼았다. 그런데 인조 17년

    조신들 사이에서 출처진퇴(신하로서 벼슬을 멋대로 물러나든가 했다는 것)의 논의가

     

    일어나 경상도 영덕(盈德)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듬해 귀양이 풀렸으나 집안을

    아들에게 맡기고 유유히 자연을 읊으며 지냈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하자 예조참의로

    특별히 불렀고 또 중추부사 공조참의로 불렀으나 끝내 사양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효종이 승하하자 우암 송시열과 대립되어 다시 유배되었다. 현종 6년 광양 유배지

    에서 돌아와 5년 뒤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85세였다. 저서로 어부사, 오우가(五友

    歌) 등이 있다. 대북파가 전멸을 당한 뒤 서인의 세상이 되었다. 이 서인과 싸운

     

    것이 남인이었다. 이 남인의 영수는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이었다.

    미수는 자를 화보(和甫) 또는 문보(文父)라고 했으며 오리 정승 이원익의 사위였다.

    태어났을 때 손바닥에 文 자가 있으므로 문보라 하였고 성장하여 흰 눈썹이 있어

     

    미수라는 호룰 지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수학했는데 한강은 한훤당 김굉

    필의 외증손자로서 대학자였다. 허목은 이분에게 배우고 다시 독학하여 나이 30에

    학문이 왕성되어 문장과 도학이 우암 송시열과 쌍벽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효종 원

     

    년에 비로소 출사(出仕) 하였는데 이때 56세였고 정랑으로서 단번에 사헌부 지평

    (持平)이 되고 효종 9년 장령으로 있다가 삼척부사로 나갔다. 삼척부사로 있을 때

    동헌의 마루 밑에 퇴조비(退潮碑)를 세워 바닷물이 더 오르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

     

    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효종은 등극하자 북벌론을 일대의 업으로 추진할 마음이 있

    었다. 양차에 걸친 호란과 볼모로 심양에 잡혀갔을 때의 일이 뼈에 사무쳤기 때문

    이다. 이리하여 젊고 어진 선비를 등용하였는데 서인인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

     

    열이 그들이었다.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은 자를 명보(明甫)라 하며 부제학을

    지낸 정경세(鄭經世)의 사위였다. 일찍이 어려서 율곡에게 사사했고 또 사계 김장생

    을 따라 수학했는데 사계가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에게

     

    배웠다. 인조 2년 진사과에 들고 사헌부 집의(執義), 천선(贊善) 등을 역임했다.

    한편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자를 영보(英甫)라 하였는데 충청도 용담사람이

    다. 어려서 사계 김장생에게 배웠고 인조 11년 생원 제 1인으로 뽑혀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으며 효종이 즉위하자 장령, 이조, 병조판서, 좌참찬, 판중추 등을 역임

    하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대 성리 학자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그의 아버지가

    늘 말하기를 “주자(朱子)는 후(後)의 공자로다. 율곡은 후의 주자로다. 그러므로 주

     

    자를 배우는 자는 마땅히 율곡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우암은 그 율곡의 주자

    학을 이어받은 대유(大儒)였다. 이 우암과 동춘당이 효종의 자문을 받으며 인물을

    하나 천거했는데 그가 바로 이완(李浣)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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