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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로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4. 2. 23:51
盤中 早紅 감이 고와도 보이느다
유자 아니라도 품엄 즉 하다마는
품어가 반기 리 업슬싀 글로 셜워하노라
<해설>
소반 위에 놓인 일찍 붉은 감이 매우 곱게도 보이옵니다. 비록 유자가
아닐지라도 품에 간직하고 돌아감직 합니다만, 아무리 갖고 가도 반기실
어버이 안 계시므로 그것을 슬프게 여기겠습니다.
王祥의 鯉魚 엇고 孟宗의 竹筍 것거
감던 마리 희도록 老萊子의 오슬 닙고
一生의 養志誠孝를 會子갓치 하리라
~박인로(朴仁老;1561~1642)~
<해설>
왕상은 효성이 지극하여 겨울에 잉어를 얻었고 맹종도 겨울에 대밭에 가서
죽순을 꺾어 그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나도 그와 같이 하고 싶구나, 어리고
젊었을 때 까맣던 머리가 늙어서 머리털이 흴 때까지 저 노래자처럼 무색옷을
입고 일생동안 어버이의 뜻을 받드는 정성스러운 효자 노릇을 증자와 같이
하여 보리라.
◈ 배경
박인로는 본관이 밀양, 자는 덕옹(德翁)이고 호는 노계(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
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만호(水軍萬戶)였는데 안동 태생으로 한음 이덕형과
아주 친한 사이였다. 인조 20년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전반생은 주로
벼슬길에 있었고, 후반생 40여 년은 오직 독서와 자연을 벗 삼으며 살았다. 30세
때 임진왜란을 맞았고 충무공 이순신 밑에서 종군하여 여러 번 전공도 세웠다.
역대 작가 중 가장 맣은 가사와 시조를 남겼는데 가사 7편과 시조 60여수가 그것
이었다. 병조판서 최명길은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가서 용골대를 만나보고 침공해
온 까닭을 물었다. 이러는 사이 조정에서는 세자와 두 왕자로 하여금 종묘의 위패
를 받들고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하였다. 인조대왕도 잇달아 군신을 거느리고 남한
산성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청나라 대부대가 뒤따라와서 성을 포위했다. 청나라 태
종도 본대를 이끌고 도착했는데 남한산성이 높고 험한 것을 보고서 노하여 용골대
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번의 침공 작전이 용골대의 건의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용골대는 열흘의 기간을 달라고 애걸하여 “반드시 강화도를 함락시켜 죄값을 치르
겠습니다.“라고 했다. 청태종도 겨우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이를 허락했다. 용골대는
일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통진 문수산 위에 이르러 진을 쳤으며 강화를 굽어보았다.
이 산에서 내려다보니 강화섬은 손바닥만 한데 갑곶에도 지키는 군사가 보이지 않
았다. 이때 강하에는 김류의 아들인 김경징(金慶徵)잉 방수대장이었고 이민구(李敏
求)가 부장(副將)이었다. 김경징은 자를 선응(善應)이라 하는데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순흥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본디 성격이 교만하고 별로 재주가 없었던 것이
다. 그리하여 강화의 자연적 지리조건만 생각하고서 술이나 장기로 세월을 보냈다.
원래 강화는 요지이다. 서울을 감도는 한강물과 개성을 감도는 임진강물이 합치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한강은 통진의 서남쪽에서 크게 굽이쳐 갑곶나루에 이르고 또
남쪽으로 마니산 뒤로 움푹 꺼진 곳을 흘러간다. 돌의 맥이 강물 속에 뻗쳐 있어
문턱 같고 복판이 조금 오묵하게 되었는데 여기가 유명한 ‘손돌목’이다. 이 손돌목
만 빠져나가면 그 남쪽이 서해의 큰 바다이다. 당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실은 배들이 손돌목 밖에 와서는 만조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이 목을 지났는데 조금
만 그 물때를 놓치면 강바닥의 암초에 걸려 배가 파선하곤 하였다. 강화도는 남북
의 길이가 백여리고 동서는 50리나 되는 큰 섬이다. 옛날부터 땅이 기름지고 한
헤 농사를 지면 3년을 먹고 산다고 하였다. 이 섬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육지와
가깝지만 강 언덕이 모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고 절벽 밑은 수렁이라서 배를
댈만한 곳이 없었다. 동쪽은 갑곶에서부터 남쪽은 손돌목에 이르기까지 절벽이
자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으며 오직 갑곶에만 배를 댈 수가 있었다. 저 고려 때
원나라의 막강한 기병대가 이 섬을 침범하지 못한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비대장 김경징과 이민구도 마음을 턱 놓고 왕자와 대신이 갑곶에 군사를 보내어
지킴이 어떠냐고 여러 번 권했으나 “되놈이 날개가 있어 날아 건널 것인가?”하고
듣지 않았던 것이다. 용골대는 문수산에서 지형 정찰을 하고 뗏목을 만들어 갑곶
나루로 건너왔다. 이라하여 강화섬이 함락되고 대신 김상용(金尙容)은 화약고에 불
을 지르고 스스로 자폭하였는데 선비의 가족인 부녀자들도 순절(殉節)한 사람이 많
았다. 바다에 달려가 물에 빠져죽은 사람이 많았는데 그 검은 머리가 어지러운 구름
처럼 물위에 떠 있었다고 한다. 난이 수습된 뒤 김경징은 조정의 탄핵을 받아 죽이
라고 아우성이었는데, 인조대왕은 김류의 외아들인 그를 차마 죽일 수 없다 하여
강계로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워낙 탄핵이 심하고 죄도 무거웠기 때문에 나라에서
그에게 약사발을 내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