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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용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4. 2. 21:53

    碧海 竭流後의 모래 모혀 섬이 되야

    無情 芳草는 해마다 푸르로되

    엇더타 우리의 王孫은 歸不歸를 하느니

                                ~구용(具容)~

    <해설>

    푸른 바닷물이 다 말라버린 뒤 모래가 모여 섬이 되고, 무정한 방초는

    해마다 봄이 돌아오면 다시 푸르러지는데, 어쩐 일로 우리의 왕손은

    한 번 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


    ◈ 배경

    구용은 인조 때의 사람으로 자는 대수(大受)고, 호는 죽창(竹窓)인데 자세한 경력은

    불명이다. 인조 14년 병자년에 청나라에서 용골대(龍骨大)가 들어와 우리나라의

    실정을 탐지했다.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남한산성의 방비였다. 그리하여 서강 선유

     

    봉(仙遊峯~지금의 제 2한강교 양평동 앞, 1960년대까지 있었으나 다리 공사 때

    없애버림)에 놀러 간다고 하였다.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은 본관이 안동으로 

    자를 자중(子中)이라 하였고 1581년에 태어나 1643년에 세상을 떠난 분인데 이때

     

    호조판서였다. 그는 선조 38년 등과하여 벼슬길에 나섰는데 광해군 3년 전라도사

    (全羅都事)로서 시험관으로 시제(試題)를 낸 바 있었다. 이 시제가 광해군의 비위에

    슬리어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귀양 갔으며, 인조반정까지 풀려나지 않았으나 그

     

    안 고금의 서적을 탐독하고 모르는 게 없었다. 그런 김시양이 용골대의 접대를 맡

    았는데 벌써 용골대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졸(吏卒)을 시켜 미리 동대문

    밖에 정렬하여 용골대를 맞이하도록 하였다. 용골대는 서대문을 향해 가는 척 하다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동대문으로 달렸다. 그런데 동대문을 나서자 길옆에 장막을

    치고 이졸들이 기다리고 있지를 않는가, 용골대는 이상하게 여기고서 “대체 누구를

    맞는 장막인가?“하고 묻자 통사(通辭)가 대답한다. ”객사(客使)께서 남한으로 가시

     

    려는 것을 호조판서께서 아셨지요. 그러므로 미리 길옆에 조촐한 잔치자리를 마련

    했으니 객사께서는 잠시 머무셨다가 가시기를 바랍니다.“ 용골대는 크게 놀라고

    (조선에 이렇듯 인재가 있으니 가보지 않아도 방비가 어떤지 알만하다) 탄식하고서

     

    그대로 말머리를 돌렸다. 용골대는 객사로 돌아왔는데, 당시 젊은 장수들이 이

    랑캐의 사자를 베어 버리자는 의논을 하였다. 용골대는 크게 두려워하고 접대사

    김시양에게 작별인사도 않고 다만 머무르던 객사 벽에“靑 ‘이라는 글자를 써 놓고

     

    밤중에 떠나버렸다. 이것이 병자년 봄의 일이었는데 아무도 그 ‘靑’자의 뜻을 알지

    못했다. 김시양은 호조판서로서 “이제 호환(胡患)이 멀지 않았으니 인재를 많이 뽑

    아 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랑캐가 반드시 겨울이 지나기 전에 쳐들어 올 것이

     

    므로 군사를 길러야 합니다.“하고 상주하였는데 김자점(金自點) 등이 ‘망령딘 소리

    를 하여 인심을 흉흉하게 하는 말이옵니다.“하고 모함했으므로 하담은 오히려 벼슬

    에서 파면되었다. 하담은 고향집에 돌아가 있었는데 용골대가 써 놓은 ‘靑’자가 겨

    울 12월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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