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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4. 2. 19:45
金爐에 香燼하고 漏聲이 殘하도록
어듸가이셔 뉘 사랑 밧티다가
月影이 上欄干캐야 脈바드라 왓느니
~김상용(金尙容;1561~1637)~
<해설>
금향로에 사른 향도 다 타버리고 물시계 소리도 이제는 거의 바닥이
난 듯 밤이 깊었는데, 어디 가서 뉘하고 사랑을 즐기다가 오는 것인지
달그림자가 난간 위까지 올라와 있는데 남의 속을 떠보려고 왔는가?
◈ 배경
김상용은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경택(景擇)이고 호는 선원(仙源) 또는 풍계(楓溪)
이다. 선조 23년 문과에 급제하고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하도로 갔다
가 이듬해 정월 강화도가 함락되었을 때 남문에 올라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자결
했다.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를 또한 잘 썼으며 시조 작품이 오륜가(五倫歌) 5수와
훈계자손가 9수 등이 전한다. 계곡 장유(張維)는 그의 사위였고 청음(淸陰) 상현(尙
憲)은 아우였다. 이때 광해주는 김개뇨(金介尿)라는 상궁에 혹하여 주야 주색잡기로
세월을 보내고 있았다. 이이첨 등은 능양군에게도 손을 대려고 했으나 도원수 한준
겸(韓浚謙)이 능양의 사위라 아직 건드리지 못했다. 능양의 반정 모의는 차츰 무르
익어 갔는데 큰 방해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이었다. 하지
만 이흥립도 충립을 지켰으므로 드디어 광해주 13년 혁명군이 서대문 밖 모화관에
모여 대궐로 쳐들어갔다. 이때 탄수 원두표는 선봉이 되어 큰 도끼로 창의문을 때
려 부수었고 인조반정이 성립되었다. 임금이 된 능양군은 오리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하여 시국을 수습했는데, 오리정승은 광해주의 목숨을 살려주자고 주장했던 것
이다. 이리하여 광해주는 강화로 보내었다가 제주도에 안치(安置) 되었는데 왕위에
서 쫓겨난 뒤 십여 년이나 더 살고 천수(天壽)를 다했다. 아계 이산해를 비롯하여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 유희분 등이 모두 주륙(誅戮)되었는데 특히 유희분의 말로
는 비참했다. 유희분을 살려주자는 공론이 더러 있었는데 온화한 인조대왕도 격분
을 참지 못하여 “임해, 순화, 능창 등 왕자를 죽인 자가 누구며 그를 살린다면 도대
체 의거의 목적이 무엇인가.“하고 외쳤다고 한다. 이리하여 유희분은 그 일족과 더
불어 서대문 만리재(萬里峴) 밖에서 목이 잘렸는데 송장을 치워주는 사람도 없었다.
이때 이종간인 청음 김상헌이 베와 관을 준비하고 그를 장사지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