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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덕령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26. 10:04

    春山의 불이 나니 못다 픤 꼿 다 붓는다

    겨 뫼 져 불은 끌 믈이나 잇거니와

    이 몸의 늬 업슨 불이 나니 끌믈 업서 하노라

                            ~김덕령(金德齡;1567~1596)~

    <해설>

    봄 동산에 불이 나니 미처 피지 못한 꽃이 다 타죽는구나,

    저 산의 저 불은 끌 수 있는 물이라도 있겠지만 내 몸에는

    연기도 없는 불이타고 있고 끌 물이 없어 안타깝기만 하구나.


    ◈ 배경

    이순신은 진린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군사들을 시켜 대대적으로 사냥을

    하여 고기를 마련했다. 진린이 도착하자 순신은 군례(軍禮)를 갖추어 멀리까지 나가

    그를 영접했다. 그리고 도착하자 그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술을 흠뻑 취하게

     

    만들었다. 명나라 군졸들은 기뻐했고 진린도 만족했다. 며칠 뒤 적선이 인근 섬에

    침범해 왔다. 순신은 이들을 격파하고 적의 머리 40수를 베어다가 진린에게 주고

    그의 공으로 돌리자 진린은 더욱 기뻐하였다. 이로부터 진린은 매사를 순신에게

     

    의논하고 나갈 때에도 가마를 나란히 하고서 가되 존경하는 의미로 결코 앞서지

    않았다. 포악한 성격인 진린도 이순신 장군의 덕을 진심으로 감복하였던 것이다.

    왜군은 다시 기가 꺾여 울산, 순천, 사천 등지를 잇는 선까지 물러갔다. 한해가 지

     

    나가고 선조 31년(1598) 왜군이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적의 괴수 풍신

    수길이 이 해 7월에 죽었으므로 그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도망갈 구명만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이들의 퇴로를 막고 명랑에서 그들을 무찔렀고 다시 노량진에서

     

    적과 혼전하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향년 45세였다. 조정과 명나라 장수

    진린, 모두 통곡하며 애도하였고 덕흥부흥군에 영의정을 추증했으며 충무라는 시호

    를 내렸다. 김덕형은 관향이 광산(光山)이고 자는 경수(景樹)라 하였는데 임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으로 적과 싸웠다. 그는 광주 석저촌(石底村)에서 태어 났는데

    8세 때 종숙 김윤제(金允悌)에게 글을 배웠고 다시 우계성 혼에게 수학했다.

    의병장으로 도처에서 적을 격파하고 공을 세우자 석저 장군이라 불리며 사람들이

     

    우러르고 선조도 충용장군이라는 호를 내렸다. 이때 종실로서 이몽학(李夢鶴)이란

    자가 있었는데 무뢰배들과 어울리고 불평이 많았다. 그러던 차 전란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어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조정에서는 비상수단으로 관

     

    작을 팔아 곡식을 거두어 들였는데 이몽학이 이 혼란을 틈타 동갑계라는 조직을

    만들고 선조 29년 7월 한현(韓玄)과 더불어 6~7백 명의 무리를 이끌고서 홍산

    현감을 사로잡고 충청도 일대 임천(林川), 청양(靑陽), 정산(定山), 대흥(大興) 등을

     

    약탈했다. 결국 이몽학은 관군의 공격과 반란군의 분열로 죽고 말았는데 김덕형이

    억울하게도 연루자로 옥에 갇혔던 것이다. 이 시조는 그 억울함을 하소연한 걸로

    장군은 옥사를 했다. 향년 29세, 한편 선조는 재위 41년으로 1608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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