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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존성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26. 19:43
아희야 되롱 삿갓 찰화 東澗의 비 디거다
긴긴 낙대에 미늘 업슨 낙시 매야
더 고기 놀라디 마라 내 홍계워 하노라.
~조존성(趙存性;1544~1628)~
<해설>
아희야 도롱이와 삿갓을 준비해라. 동쪽 시내에 비가 왔다.
기나긴 낚싯대에 미늘 없는 낚시를 매어 물에 드리웠으니
저 고기들아, 놀라지 마라, 내 흥이 나서 하는 노릇이니까.
◈ 배경
조존성은 본관이 양주로서 자는 수초(守初)이고 호는 정곡(鼎谷) 또는 용호(龍湖),
일찍 우계 성혼에게 사사했으며 다시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에게 배웠다. 선조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대교(待敎)고 있다가 정철의 당이라 하여 한 때 파직
되었으나 다시 전적 예조좌랑, 강화부사를 지냈고 광해조 때 생모추존(生母追尊)의
그릇됨을 주장했다. 인조반정이 되자 강원관찰사,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인목대비
폐위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호서지방에 은퇴했으며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
다. 작품으로 호아곡(呼兒曲) 4곡이 전한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1575~1641)은
본디 성격이 용렬하지 않았으나 당쟁에 휩쓸려 폐정(弊政)이 많았다. 특히 이이첨,
정인홍 그리고 처남인 유희분(柳希奮)을 중용함으로서 정치를 보는 눈이 흐려졌다.
당쟁이란 것이 얼마나 뿌리 깊고 얽이섥이 얽혀있는지 알아보자, 너무나 복잡
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고 나중에는 넌더리마저 나게 되리라.
그러나 역사는 외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중종,
명종 연간에 ‘대유’ ‘소유’의 싸움에서부터 심의겸과 김효원의 하찮은 감정적 대립
으로 동서의 당이 생겼다. 이때 김효원의 동인의 파로서 서애(西崖), 유성룡, 아계
(鵝溪), 이산해(李山海),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초당 허엽(許曄), 동암(東庵)
이발(李潑)과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한편 심의겸의 서인의 파로서 송강 정철,
팔곡 구사맹(具思孟),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사암(思庵) 박순(朴淳) 등 역시
뛰어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동서인 이라고는 하나 자기 자신 그렇게
느끼고 있지 않았다. 모두들 젊은 혈기에 넘친 사람들로서 자기 자신 나라를 위해
힘쓰고 있다고 자부하는 터였었다. 그럴 때 영의정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오래 병중에 있다가 죽기 전에 선조께 상소문을 올렸는데 “지금 사람들이 모두 고담
(高談)과 대언(大言)으로 당을 맺고 있으니 나중에는 반드시 나라의 뽑지 못할 큰
화근이 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 말은 영의정으로서 국가 장래를 근심하는 말이
었는데 젊은 사람의 귀를 거슬렀고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아직 붕당도
없는데 무슨 늙은이의 잠꼬대 같은 소리야“ 이때 율곡 이이는 가장 청백하고 중립
적인 인물이었으나 경연에서 임금께 상소를 하였다. 그 내용인즉 “조정에 무슨 파당
이 있다하겠는가, 대저 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착하다고 하였는데 준경의 말은
나쁘지 않은가?“ 율곡의 이 말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서인이 율곡이 이 말을 역이용
하여 동인을 몰아내고자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