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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기수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25. 11:34
물은 거울이 되어 窓 아뢰 빗겨거늘
뫼혼 병풍이 되어 하늘 밧긔 어위엿늬
이 중의 벗사몬 거는 백구外예 업서라
~곽기수(郭期壽;1549~1616)~
<해설>
거울같이 맑은 물이 창 앞에 비스듬히 흐르고 있거니와
산 또한 병풍처럼 하늘을 찌를듯 둘러처져 있네,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속에 내가 벗삼는 것은 오직 백구밖에 없다.
◈ 배경
곽기수는 자는 미수(眉受)이고 호는 한벽당(寒碧堂)인데 한벽당 문집이 전한다.
서울에 왜군이 주둔하지 반 1 년이 가까워, 그야말로 죽음의 도시였다. 그리고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여 굶어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아마 전란으로 죽은
사람보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더 많았으리라. 왜군도 지쳐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스스로 물러가기 시작했고 서울은 4월 20일 수복되었다. 왜군은 남쪽 해안지방인
울산 서생포서부터 동래, 김해, 웅천, 거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16개의 성채를 쌓고
주둔했다. 그리고 그들은 강화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6월 포로가 된
임해군, 순화군과 황정욱 등 전직대신을 송환에 왔다. 이무렵 진주성 공방전이
벌어져, 목사 서예원(徐禮元), 김천일, 최경희, 고종후 등이 여드레 동안 적을 맞아
버티다가 성이 함락되고 모두 전사했다. 선조 26년 6월 28일이었다. 김천일(金千
鎰)은 광주사람, 자는 사중(士重)이고 호는 건재(建齋)인데 이항(李恒)에게 수학
했다. 고경명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고 수원의 독산 산성에서는 권율과 함께
싸웠다. 그리고 제 2차 진주성 방어 싸움에서 전사했다. 선조는 좌찬성을 추증하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논개(論介)는 성이 주(朱)씨 인데 본디 선비의 후예로서
장수(長水)에서 살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서 어렵게 살다가 황진
(黃進)이라는 현감의 소실이 되었다. 황 현감은 나중에야 그녀가 선비의 딸이란 것을
알고 자기의 승진에 지장이 있어 ~선비의 딸을 첩으로 두면 파면과 같은 벌을 받게
된다.~ 임시변통으로 호방에 명하여 그녀를 기생으로 적을 올리게 하였다. 임란이
일어나자 황진은 진주병사가 되고 싸우다 전사하였는데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촉
석루(矗石樓)에서 축하연을 열었다. 논개도 기생으로서 여기에 끌려 나갔는데 왜장
모곡천(毛谷村文助)을 부여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이 해 10월 선조가
서울로 환도하고 전선이 소강상태로 들어가자 명나라 장군 이여송도 돌아가고 유정
(劉艇)만이 1 만 남짓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았다. 명나라 역시 이 전쟁에서 희생이
크고 그 국력이 쇠약해져 있었다. 선조 27년과 28년은 명나라 사람 심유경(沈惟敬)이
일본을 왔다 갔다 하는 등 강화에 대한 교섭이 지지부진이었다. 그래도 선조 29년
왜군은 조금씩 철수하여 부산의 네 진지 말고는 모두 물러갔다. 이 동안 우리의
문화제와 기술자, 양민이 수없이 끌려갔음은 말할 나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