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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원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24. 20:21
牕外三更細雨時에 兩人心思兩人知라
新情이 未洽한듸 하늘이 장차 밝아온다
다시금 羅衫을 뷔여 잡고 뒷기약을 정하더라.
~김명원(金命元;1534~0602)~
<해설>
깊은 밤중 창밖에서 소리없이 이슬비가 내리고 있을 때 두 사람의
깊은 속마음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알 뿐이다. 그 새롭기만 한 정이
아직도 흡족하지 못한데 벌써 밤은 물러가고 밖에 훤하게 밝아오고
있다. 그러나 차마 헤어질 수가 없어 다시금 나삼을 부여잡고 다음
만날 약속을 다짐한다.
◈ 배경
김명원은 본관이 경주로서 자는 응순(應順)이고 호는 주은(酒隱)이다. 명종 13년
생원이 되고 동 16년 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초년 전라관찰사를 지냈다. 무신이
아니고 문신이었다는 게 적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원인이었으나 원만한
성격이라 사람들이 따랐다. 평양에서 더 이상 어가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격론 끝에
선조는 다시 북으로 안주(安州)를 향해 떠났는데, 좌의정 윤두수와 도원수 김명원,
그리고 순찰사 이원익(李元翼)에게 평양을 지키라고 했다. 윤두수(1533~1601)는
본관이 해평으로 자는 자앙(子仰)이고 호는 오음(悟陰)인데 월정(月汀) 윤근수(尹
根壽)의 형이다. 사형제가 다 등과한 명문으로서 청송 성수심(成守深) 에게 글을
배우고 명종13년 문과에 급제하여 각 요직을 거치고 좌의정에 올라 있었다. 그의
아우 월정은 여섯 번이나 요동에 가서 원병을 청한 외교솜씨가 뛰어난 사람인데
저 고구려 때 안시성의 싸움에서 당태종을 물리친 용장의 이름을 양만춘(楊萬春)
이라고 비로소 알아갖고 돌아온 걸로 유명하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선 안시성의
싸움은 알고 있었으나 양만춘의 이름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그 이름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원익(1547~16340)은 자는 공려
(公勵)이고 호는 오리(梧里)인데 왕자 익녕군(益寧君)의 현손이다. 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판서로서 평안도 도순찰사를 겸하여 평양을 지키게 되었던 것이다.
6월 11일 어가가 평양을 떠남과 동시에 그것을 기다리기나 한 듯 수일 전부터
대동강 동안에 와 있었던 왜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격전이 벌어져, 적 수백 명을
살상하고 말 삼백 필을 노획하기도 했지만 평양성마저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