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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봉)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24. 21:10
초방석 내디 마라 락엽윈들 못안즌랴
솔불 혀디 마라 어제 딘 달 도다 온다
아희야 박주 산채일망정 업다 말고 내어라.
~한호(韓濩;1543~1605)~
<해설>
짚으로 만든 방석을 일부러 내놓을 것 까지는 없다. 떨어진 낙엽인들
못 앉겠는가, 관솔불을 쓸데없이 켜지 마라. 어제 진달이 돋아 오르고
있으니까, 얘야 변변치 못한 술과 산나물일망정 없다말고 내오너라.
◈ 배경
한호는 본관이 청주로서 자는 경홍(景洪)이고 호는 석봉(石峯)이다. 송도 태생으로
어머니가 떡장수를 하면서 그의 글공부 뒷바라지를 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이다.
임진왜란 때 의주 행재소에서 외교문서의 글씨를 쓰는 등 바빴는데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과 마귀(麻貴) 등이 그의 글씨를 다투어 얻어갔다. 왜냐
하면 한석봉의 글씨는 중국에서도 유명하여 수천금의 값이 나갔기 때문이다. 평양
함락을 전후하여 명나라의 선발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어 7월초 명장(明將) 조
승훈(祖承訓)이 군사 5천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또 이때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가 팔도 16종(宗)의 도총섭으로 순안(順安)의 법흥사(法興寺)에서 승병
7천 5백을 모집 편성하였다. 유명한 사명당 송운대사(松雲大師;1544~1610)도 여기
에 참가하여 지휘를 맡았다. 7월 19일 조승훈의 명나라 군과 우리의 승병이 평양을
공격했으나 탈환하지 못했으나 왜병은 많이 죽였다. 그러나 기쁜 소식이 있었다.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이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더불어 거제도 앞바다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 승리로 이순신이 비로서
우리나라 뿐 아니라 명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이순신은 덕수(德水) 이씨
로서 자는 여해(汝諧)이고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선조 7년 무과에
급제하여 말단직을 전전하다가 선조 24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좌수영에
부임했다. 그리고 옥포(玉浦) 해전에서 적선 30여 척을 무찔렀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원균( ?~1597)은 자를 평중(平仲)이라 하였는데 적군이 침입해오자 적의 군
세가 강대함을 보고서 감히 출격하지 못하고 휘하 전선 백 여척과 화포, 병기 등을
죄다 바다 속에 던지고 육지에 올라 적을 피하고 있었다. 비장(裨將) 이영남(李英
男)이 간했다. “공은 왕명을 받은 수군절도사로서 군사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간다면
조정에서 죄를 문책할 때 뭐라고 변명하시겠습니까? 전라도에 원병을 청하여 적과
한 번 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니 이기지 못한다면 그때 가서 도망쳐도 늦지 않습니
다.“ 원균도 그 말이ㅣ 옳다 여겨져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첫 승리
거두었던 것인데 이순신은 다시 당항포 해전에서도 이겨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
며 좌수영에서 본영을 한산도로 옮겼다. 앞에서 나온 시조는 이때 읊은 것이며,
‘水國秋光暮 驚寒雁陳高 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라는 한시가 유명하다. 원균은 삼군
절도사가 된 순신 밑에 있기가 싫어 스스로 충청병사를 자청했는데 이때부터 순신
을 갖은 모략으로 모함하기 시작했다고 하나 납득이 별로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순신이 실제 무고된 것은 선조 29년 3월의 일로서 당시의 당쟁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