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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24. 20:17
한산섬 달 밝은 밤의 戍樓의 혼자 안자
큰 칼 녑회 차고 깁흔 시름 하는 次에
어디서 一聲 胡茄는 내의 애른 긋느니
~이순신(李舜臣;1545~1598)~
<해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변방 수자리 망루에서 적병을 막고자 외로이 앉아
큰 칼을 차고 깊은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어디서 한 곡조의 피리소리가
들려와서 나의 그렇지 않아도 답답한 애를 끊어 놓는구나.
◈ 배경
한응인(韓應寅)과 김명원의 부대가 임진강에서 또 한 번 패하였다. 처음에 아군은
배를 모두 북안에 매어두고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적군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10여
일이나 대치했다. 그러다가 왜군은 진막을 불태우고 강기슭에서 물러났다. 퇴각
하는 체 하며 아군을 유인하려는 작전이었던 것이다. 아군이 이 작전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평안도 쪽으로 온 고니시(小西行長)와는 달리 함경도를 향한 가또(加藤
淸正)는 적군 중의 명장이었다. 북병사 한극함(韓克諴)이 6진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정창(海汀倉)이란 곳에서 이 가또의 부대와 처음으로 맞닥뜨렸다. 우리 북도 군사
들은 말달리기와 활쏘기에 능란하여 적을 꽤나 많이 죽였지만, 조총에는 역시 속수
무책이었다. 이리하여 아군은 패하고 한극함은 경성(鏡城)까지 달아났다가 마침내
포로가 되고 말았다. 또 회령까지 다다른 임해군과 순화군의 두 왕자도 회령부의
아전 국경인(鞠景仁)이 그 무리들과 배반하여 왕자를 붙잡고 적군에게 바쳤다.
아직도 적세가 너무나 강했다. 그러나 적군의 병참선이 길어지고 부대가 분산됨에
따라 적의 기세도 차츰 처음만 못하게 되었다. 뿐더러 사방에서 의병의 일어나
유격전 형식으로 이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개전 두달 만에 평양성까지 함락시킨
일본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밀리기 시작했다. 의병들과 이순신에게 완패
당하니 지원병력과 식량을 싣고 올 배들이 조선 땅에 발을 못 붙이게 되었기 때문
이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발령을 받았을 때 적은 수의 낡고 고장 난 무기뿐,
군선도 겨우 몇 십 척에, 군사의 수도 적었다. 게다가 그는 당파간의 모략 으로 구속
되는 어처구니없는 불행까지 당했었다. 경제적 지원도 이뤄지지 않아 직접 둔전을
개간, 경작해 군량미를 만들었다. 이순신이 위대한 것은 그가 1510년 삼퐁왜란 이래
빈번했던 왜구의 침탈과 일본의 통일과정을 보면서 전쟁을 대비해 왔다는 데에 있다.
이순신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대 정비였다. 그는
군선과 병기를 고치고 새로 장만하기도 했고, 병사들을 미리 훈련시키는 한편,
해로를 관찰하고 군사작전의 윤곽을 그려놓아 해전의 전술적 방침도 마련해두었
었다. 또한 정부의 지원이 없어 군량미 조달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어장과
염전을 개설하고 둔전을 설치해 군사물자를 직접 조달할 방편을 마련했던 것이다.
장군은 "일본군이 육지로 상륙하기 전에 부산 앞바다에서 함포로 섬멸하였더라면
나라 전체의 참화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고 탄식했었다. 장군은 기본에 충실해
늘 군사훈련을 통해 유사시에 눈빛만 봐도 서로의 뜻을 알 수 있도록 훈련시켰고,
신뢰와 따뜻한 인간미로 사심이 없었다. 자나 깨나 가련한 백성들을 위한 생각뿐
이었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백성들을 배려하였다. 그리고 솔선수범으로 늘 모범
을 보였었다. 이것이 부하장수들에게 믿음을 주어서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끈끈
한 동지의식을 키웠다. 격불치지(格物致知~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악하여 안다.)
정신으로 최선의 대책을 찾아 적을 맞았기에 연승을 할 수 있었다. "장부로서 태어나
나라에 쓰이면 죽기로서 최선을 다하고, 아니면 들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강직한 성품이 엿보이는 "必生卽死 必死卽生" 이말은 모든이의 가슴에 남아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