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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조대왕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23. 22:07

    金烏 玉兎들아 뉘 너를 쫓니관듸

    구만리 長天의 허위허위 단니는다

    이후란 십리에 한 번씩 쉬여 더듸 더듸 니거라

                                                 ~이름 모름~

    <해설>

    해야 달아 누가 너를 쫓아 몰아오기에 넓은 하늘을 그렇듯 허위허위

    다름 질을 치느냐? 이제부터는 그러자 말고 십리마다 한 번 쉬고

    쉬엄쉬엄 더디 가려무나.


    오면 가랴 하고 가면 아니 오네

    오노라 가노라니 볼 날히 전혀 업네

    오날도 가노라 하니 그를 슬허 하노라.

                                     ~선조 대왕(宣祖;1552~1608)~

    <해설>

    오면 가려하고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구나, 왔다가는 모두 가버리니

    만나볼 날이 아주 없구나, 오늘도 또 그대가 간다고 하니 그것을 슬퍼한다.

     

    ☞ 이 시는 선조 5년 이조판서였던 노진(盧禛)이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 갈 때

        한강까지 배웅을 나간 선조가 은쟁반에 이 시를 담아 전해주었다고 한다. 


    ◈ 배경

    한편 서울에서는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에 임명하고 이전(李戰)과

    변언수(邊彦琇)를 좌우 부장으로 임명, 왕도를 지키게 하였다. 또 김명원(金命元)

    을 도원수에 임명하고 한강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파천(播遷)할

     

    움직임이 있었는데 종친들이 합문(閤門=임금이 거처한 便殿의 문) 밖에 모여 통곡

    하면서 서울을 버리지 말라고 호소했다. 영부사인 김귀영(金貴榮) 같은 이도 임금

    을 뵙고 서울 사수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난 서울의 수비는 너무나 빈약했다.

     

    왜군은 15만의 정병이었으나, 당시 서울을 지킬 군사는 겨우 7천 남짓이었다. 조

    정에서는 외교 교섭 노력의 하나로 이덕형(李德馨)을 왜군에게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충주가 함락되었으므로 접촉에 실패하고 되돌아 왔다. 신립의 본관은 평

     

    산(平山)으로서 자는 입지(立之)이다. 명종 22년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 진주판

    관을 거치고 온성(穩城) 부사로 있을 때 북변 여러 고을에 침입하는 여진족을 격

    퇴하며 그 용맹을 떨쳤다. 충주싸움에서 천연적 요새인 새재에서 적을 막지 않았

     

    다고 비판이 있지만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신립의 병력은 간신히 긁어

    모아 8천여 명이었다. 종사관인 김여물(金如岉)이 “장군 새재를 지켜야 합니다.

    새재의 천험이라면 적의 맹기(猛氣)를 꺾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신립은 ”모르는

     

    소리, 우리 군사는 적고 훈련도 부족하니 배수의 진을 칠 수 밖에 없다. 달아날

    수 없어야 비로소 결사적으로 싸울 수 있는 것이다.“하고 달천을 등지고 배수의

    진을 쳤던 것이다. 4월 28일, 적군이 몰려왔다. 신립과 김여물 등은 엄청난 대군

     

    을 맞아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리고 무수한 상처를 입은 신립은 강물에 몸을 던

    져 죽었던 것이다. 김여물도 난군 속에서 전사했다. 신립은 뒷날 영의정이 추증

    되고 총장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일도 이 작전에 참가했으나 탈출했다. 충주

     

    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선조는 드디어 서도로 피난길을 떠났다. 파천에

    앞서 “왕자들을 각 도에 나눠 보내고 근왕병(勤王兵)을 모집케 하는 게 좋겠읍니

    다.“ 이리하여 임해군(臨海君)은 함경도에 가기로 하고 김귀영과 윤탁연(尹卓然)

     

    이 수행했으며, 순화군(順和君)은 강원도로 가기로 하고 황정욱(黃廷彧)과 황혁을

    딸려 보냈다. 세자는 임금과 같이 가기로 하였다. 4월 30일 새벽 어가는 경복궁

    을 나섰다. 시가의 양쪽에서는 슬피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을 지나 사현(沙峴) 고갯마루에 이르자 날이 훤하게 밝아왔다. 뒤돌아

    보니 남대문 안의 큰 창고에서 불이 일어나 화염과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여가라 하여도 대신과 벼슬아치들, 궁녀들이 뒤따르고 호위군사도 적었다. 더구나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초라한 물골들이었다. 이윽고 경기감사 권징(權徵)이 와서

    호위했다. 벽제에 이르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궁녀들이 모두 울면서 길을

    갔다. 임진강에 이르기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날은 강을 건너 동파(東坡)에

     

    서 자고 초하룻날을 늦게 출발하여 개성에 도착했다. 여기서 수상에 대한 탄핵이

    일어나고 유성룡(柳成龍)이 영의정에, 최흥원(崔興源)이 좌의정에 윤두수(尹斗壽)

    가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저녁 때 유성룡은 서인 정철을 모함하였다는 죄로 파

     

    직되고 최흥길이 영의정, 윤두수가 좌의정, 새로이 유홍(兪弘)이 우의정이 되었다.

    당시의 갈팡질팡하던 조정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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