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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양원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23. 22:44

    노프나 노픈 남게 날 권하야 올려두고

    이보오 벗님네야 흔드디나 마르되야

    나려뎌 죽기는 섧디 아녀도 님 못 볼가 하노라.

                             ~이양원(李陽元;1526~1592)~

    <해설>

    높으나 높은 나무에 나를 권하여 올라가게 해놓고 여보시오 벗님네들이여

    제발 그 나무를 흔들지나 마시구료, 내가 그 나무에서 떨어져 죽기는 그리

    슬픈 일이 아니거니와 다시 임을 뵙지 못하는 것이 원통하구나.


    ◈ 배경

    이양원의 자는 백춘(伯春)이고 호는 노자(鷺者)인데 충신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고 독서를 즐겼는데 이중호(李仲虎)에게 배우고 다시 퇴계 이황에게 배웠다.

    명종 10년 진사가 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사인(舍人)이 되고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갔다가 상사가 병사하자 훌륭히 그 사명을 마치고 돌아왔다. 선조조에 형조

    판서,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다시 유도대장을 맡게 되었다. 5월

    3일 왜군이 서울에 침입했는데 이양원과 김명원은 패하여 달아났다. 이양원은 양주

     

    (楊州)로 갔는데 거기서 강원도 조방장(助防將)인 원호(元豪)를 만나 양주일대를

    지켰다. 이 무렵 전라감사 이광(李洸),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尹國馨), 경상 순찰사

    김수가 각각 본도의 군사를 이끌고 북상해 왔는데 용인에서 왜군과 충돌했다. 최초의

     

    대전투였으나 이때도 우리 군이 패하였다. 그런데 양주 해치고개에서 왜군의 목 60여

    급을 배는 첫 승리를 이양원과 부원수 신각(申恪)이 올렸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뛸 듯이 기뻐하였다. 원래 신각은 김명원 밑에서 부원수였다. 김명원

     

    이 임진강에서 장계를 올리면서 그가 양주로 간 것이 지휘권을 무시한 처사라고 보고

    했다. 이 보고를 받은 우의정 유홍은 “만일 그렇다면 군율을 바로 잡기위해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하고 임금께 아뢰었다. 이리하여 선전관을 보내 그를 처단케 했는데,

     

    첫 번째 첩보(捷報가 올라왔던 것이다. 이래서 허둥지둥 취소명령을 내렸으나 신각은

    이미 목이 잘린 뒤였다. 이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이양원은 선조께서 이미 의주 행재소를

     나와 압록강을 건너가셨다는 헛소문을 듣고 비통한 나머지 이레 동안 단식하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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