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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경명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23. 19:37

    건곤이 有意하야 남아를 내였더니

    세월이 無情하야 이 몸이 늙어 셰라

    공명이 在天하니 슬히 므삼하리오.

                      ~이름 모름~

    <해설>

    하늘과 땅이 뜻을 갖고서 사내대장부를 세상에 낳게 하셨는데

    세월이 너무도 무정하여 벌써 이 몸이 늙었구나, 공명이라는 건

    모두 하늘에 달린 것이므로 그것을 한탄할 수는 없는 것이다.


    靑蛇劍 두러메고 白鹿을 디률타고

    扶桑 디는 해에 洞天으로 도라드니

    仙宮에 鐘磬 맑은 소리 구름 밧게 들니더라

                           ~고경명(高敬命;1533~1592~

    <해설>

    청사검을 둘러메고 고귀한 흰 사슴을 눌러 타고서, 해 뜨는 곳에

    해가 질 무렵 신선들이 사는 곳에 이르렀더니 신선의 궁전에서

    울리는 쇠북과 경쇠소리가 구름 위로 들려오는구나.


    ◈ 배경

    임진왜란에 대해서 아주 무방비였던 것은 아니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조정에서

    는 왜국의 동태를 염려하여 국경수비에 밝은 사람을 뽑아 전라, 충청, 경상도를 순찰

    하며 대비하게 했다. 그래서 김수(金晬)를 경상감사에, 이광(李洸)을 전라감사에, 윤선

     

    각(尹先覺)을 충청감사에 임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성을 새로 쌓거나 수축케 했다.

    또 정읍현감이던 이순신(李舜臣)을 발탁하여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했다. 그런

    데 이 당시 무장으로서 이름이 알려진 분은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이었다. 선조 25

     

    년 봄 이일 장군을 지방에 파견하여 임전태세를 순시케했다. 신립 장군은 성격이 과격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그렇기 때문에 왜국의 공격이

    있더라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하고 싸우기 전부터 장담했다. 이것을 염려한 조정 대

     

    신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워낙 용맹스럽게 때문에 중임(重任)을 맡겼던 것이다. 고경

    명은 자는 의순(義順)이고 호는 태헌(苔軒)인데 명종 13년 문과에 급제하고 동래부사

    에 이르렀다. 선조 24년 나이가 이미 늙어 부사를 사임했는데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송상현(宋象賢;1551~1592)이다. 그런데 선조 25년, 4월, 13일 마침내 왜병이

    침범해 왔다. 부산 앞바다가 새카맣게 몰려왔던 것이다. 이때 부산포 첨사 정발

    (鄭撥;1553~1592)은 이들과 싸우고 맨 먼저 전사했다. 정발은 관향이 경주이고 자는

     

    자고(子固)인데 25세 때 사마시에 들어 선전관, 훈련부장을 거쳐 부산포 첨사가 되었

    던 것이다. 적이 새까맣게 성을 포위하자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검은 전포(戰袍)

    를 입고 싸웠는데 적이 흑의 장군이라 불렀다고 한다. 좌수사 박홍(朴泓)은 적세가

     

    워낙 강대하여 몸을 피했다. 왜군은 이미 군사를 나눠 서평포(西平浦)와 다대포(多大

    浦)를 각각 함락시켰다. 이때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은 힘껏 싸웠으나 당해내지

    못하고 전사했다. 적은 다시 동래로 몰려왔다. 부사 송상현은 자를 덕구(德救), 호는

     

    천곡(泉谷)이다. 그는 10세 때 경사에 능통했고 선조 9년 문과에 급제 정랑, 군자감

    (軍資監)의 정(正)을 역임했다. 이때 동래는 군사적 요지로 사람들이 죽음의 땅이

    라고 했다. 왜군이 쳐들어오면 꼭 죽게 된다는 의미다. 적군이 몰려오자 좌병사 이각

     

    (李珏)이 동래로 뛰어왔는데, 같이 지키자는 송부사의 말을 듣지않고 성밖에서 기각

    지세(掎角之勢)로 적을 견제하겠다 하면서 성 밖으로 나갔다. 이어 적병이 동래성을

    포위했다. 송부사는 관복을 갑옷위에 입고 문루 위에 올라가 단정히 앉아 있었다.

     

    이것을 본 적장 다이라가 가까이 와서 그 덕에 감동 빨리 피하라고 손짓했으나 움직이

    지 않았다. 그리고 성이 함락되려 하자 북쪽을 향해 멀리 임금께 절하고 적병의 칼을

    받았다. 적장은 그의 청성된 인품에 감동 남문 밖에 정중히 장례를 치러 주었다고 한

     

    다. 고경명은 늦게서야 왜군 침입을 알았으나 6월에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늙은 선비로서 국난을 맞아 궐기했으며 각처에 격문을 보냈고 천여 명의

    의병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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