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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혼이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22. 21:01
時節이 太平토다 이 모미 한가커니
竹林 深處에 午鷄聲 아니런들
깁히 든 一場 華胥夢을 어느 벗이 깨오리
~성혼(成渾;1535~1598)
<해설>
시절이 태평하며 아무 일잉 없도다. 이 몸이 한가하거니와 대나무 숲
깊은 곳에서 누워있는 나에게 만일 한 낮의 닭 울음소리가 아니었던들
깊이 들은 이 좋은 꿈을 대체 어느 벗이 찾아와 깨울 것인가?
◈ 배경
성혼은 자는 호원(浩原)이고 호는 우계(牛溪)이다.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아들로서 형이상학적 철리(哲理)를 연구한 주자 학자였다. 파주 우계란 곳에 살았
으므로 우계 선생이라 하였는데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선조 처기 윤현(尹炫)이 그의 학문이 높음을 알고 추천했으나 사양했으며 그 뒤
지평, 적성현감, 이조참의, 참판 등을 발령했으나 혹은 취임하고 혹은 사양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검찰사로 부름을 받았는데 병을 무릅쓰고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렀고 당장의 대책 세 가지를 상주하였다. 우계는 율곡과 같은 시대의 유학자로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이기설(理氣說)을 토론할 때 다른 학자가 밝히지 못한 학설을
내놓았다고 한다. 율곡의 권유로 선조의 경연에서 잠시 강의하였으며 율곡이 별세
한 뒤에도 강연에 얼마동안 나간 뒤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선조 31년
향년 64세로 세상을 하직했는데 관작을 추탈(追奪) 당했다. 임진왜란 때 유성룡과
강화를 주장했다는 이유였으나 인조 때 복관되고 좌의정을 추증하였다. 선조 19년
일본의 사신이 도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편지를 가져왔다.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왕 노릇을 했는데 “우리는 줄곧 조선에 사신을 보내곤 했는데 조선에서는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지 않으니 우리를 무시하는 게 아닌가.“하는 내용이었다. 저에
는 우리 속에서도 통신사가 일본에 가곤 했었는데 끊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
정에서는 사신을 보내지 않고 단지 서한만 보냈다. 히데요시는 그 뒤 평의지(平義
智)라는 사신을 또 보내왔다. 이번에도 통신사의 파견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때도
통신사를 보내느니 안 보내느니 조정에서 말이 많았는데 마침내 선조 23년 첨지(僉
知) 황윤길(黃允吉)과 사성(司成), 김성일(金誠一)을 각각 상사와 부사로 임명하고
일본에 보냈다. 황윤길(1536~? )은 본관이 장수(長水)인데 자를 길재(吉哉)라 했
고 호는 우송당(友松堂)이다. 저 유명한 황희(黃喜)의 현손(玄孫)으로 명종 16년
문과에 급제하고 각종 요직을 거쳤는데 서인에 속했다. 한편 김성일(1538~1593)은
본관이 의성인데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는 학봉(鶴峯)이다. 퇴계에게 글을 배웠고
선조 원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성에 올랐는데 정사 황윤길과 서장 허성(許筬)과 더
불어 일본에 갔으며 이듬해 3월에 귀국했다. 선조께서 이들에게 일본의 실정을 물
었다. 그러자 윤길이 “풍신수길이란 자가 몹시 간악하고 태도가 교만한 것이 큰
화를 일으킬 것 같았습니다.“ ”큰 화라니?“ ”그가 감히 우리나라를 넘보고 전쟁을
일으킬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선조는 성일을 보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신은 그런 일이 일어날 징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정사와 부사의 대답이 전혀
정반대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동인이 세력이 강했으므로 성일의 말을 쫓아 별일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대노하고 김성일을 당장
죽이라고까지 명령했으며 황윤길의 말을 좇지 않음을 후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