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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22. 19:47
高山九曲潭을 사람이 모르더니
誅茅 卜居하니 벗님늬 다 오신다
어즈버 武夷를 상상하고 學朱子하리라
~이이(李珥;1536~1584)
<해설>
고산의 아홉 구비 계곡의 아름다운 경치를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는데
내가 초막을 짓고 사니 벗들이 찾아보는구나, 아 주자께서 공부하던
무이땅을 상상하며 나도 주자의 학문을 배우리라.
◈ 배경
이이는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인데 덕수 이씨로 아버지는 원수(元秀)
이고 어머니는 너무도 유명한 신사임당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견룡(見龍)인데
어머니가 태몽으로 용을 보고서 낳기 때문이었다. 율곡은 어려서 강릉 경포대의
외할머니 댁에서 자랐는데 세 살 때부터 그 천재적 재질을 발휘했다. 그는 13세 때
진사에 급제했으나 어머니 사임당이 돌아가자(16세 때)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금
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한 바 있어 1년 만에 집으로 돌아 와
성리학 연구에 몰두, 명종 13년 당시의 석학 퇴계선생을 찾아가 학문을 논했는데
퇴계는 그의 재능에 감탄했다. 그해 겨울 별시(別試)부터 해마다 장원을 하여 아홉
번 장원을 하고 벼슬길에 올랐는데 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로 대표되는데 그가 23세 때 지은 천
도책(天道策)에 이미 그 싹이 엿보인다. 또 그는 일생을 두고서 입지(立志)를 강조
했는데 이 뜻을 세움이 모든 분야, 학문은 물론이고 정치에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학문 뿐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것은 너무난 유명한 이야기다. 이밖에도 대동
법(大同法)실시, 사창(社倉) 설치 등을 건의하여 사회혁신을 가져왔고 일반 백성의
계몽을 위해서 많은 규약을 만들어 동방의 성인이란 말을 들었다. 또 사임당이 돌
아가고 계모가 들어왔는데 그 봉양을 깍듯이 하였다. 향년 49세로 돌아가니 문성
(文成)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 율곡전집,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 소학
집주(小學集註) 그리고 시조로 고산구곡(高山九曲)이 전한다. 그의 아우 우(瑀)도
거문고, 그림, 시 글씨를 잘 썼다. 아마도 어머니 신사임당의 영향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