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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철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22. 16:33

    간나희 가는 길흘 사나희 에도드시

    사나희 네는 길흘 계집이 츼도드시

    제 남진 제 계집 아니어든 일흠 뭇디 마오려


    <해설>

    아낙네가 길을 가고 있을 때 남자가 그 길을 돌아가듯이

    또 남자가 가는 길을 아낙네가 피하고 비켜 가듯이 그렇게

    서로 남녀유별을 지켜야 하며 만일 자기 남편이거나 자기

    아내가 아니거든 공연한 말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으리라.

     

      

    남진 죽고 우는 눈물 두 져죄 나리 흘러

    졋 마시 짜다 하고 자식은 보채거든

    뎌놈아 어늬 안흐로 계집되라 하는다.

                         

    <해설>

    남편 죽고 슬피 우는 눈물이 두 젖으로 흘러내리어, 젖에

    섞여 젖 맛이 짜다고 어린 자식은 보채고 있는 형편인데,

    이 못된 놈아 무슨 마음으로 제 계집이 되라고 볶아대는가.



    기울계대 니거니 뜨나 족박귀 업거니 뜨나

    비록 이 셰간 板蕩할 망정

    고온 님 괴기옷 괴변 그를 잇고 살리라.


    <해설>

    심부름꾼이 다 가거나 말거나 조그만 바가지가 하나도 없거나

    말거나 비록 이 살림살이가 다 어지러워 질 지라도 고운님의

    사랑만 받을 수 있다면야 그 고운님 만 믿고 살겠네.

     

     

    나모도 병이 드니 亭子라도 쉬리 업다

    호화히 셔신 제는 오리 가리 다 쉬더니

    닙 디고 가지 것조 후는 새도 아니 안는다.


    <해설>

    나무도 병이 들어서 기운이 약해지자 정자 나무련만 이제는 아무도

    쉬어가는 사람이 없다. 이 정자나무가 가지도 무성하고 잎이 퍼지어

    그늘이 넓고 호기 있게 서 있을 때는 오고가는 사람들이 모두 한 번씩

    쉬어가더니 이제 나무라도 잎이 다 떨어지고 가지까지 꺾인 후에는

    새조차도 들어앉지 아니한다.

     


    내 말 고텨 드러 너 업스면 못살려니

    머흔 일 구즌 일 널로 하야 다 낫거든

    이제야 남 괴려 하야 녯벗 알고 엇더리

                        ~정철(1536~1593)~

    <해설>

    내 말을 다시 한 번 들어보라, 네가 없으면 나는 못 살 터이다.

    험악하고 악한 일을 당할 적마다 널로 해서 다 그것을 잊을 수가

    있거든, 이제 다른 사람 사랑 받고자 하여 옛날 벗을 잊을 수 있으랴.

     


    ◈ 배경

    선조대왕의 왕비는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인데 국구는 박응순(朴應順)이었다.

    명종 원년 진사에 오르고 현감 등을 역임했는데 딸이 왕비로 간택되자 영돈녕부

    사에 도총부 도총관을 겸했다. 그러나 국구이면서 용모가 단정하고 언행이 신중

     

    했으며 한사(寒士의)의 생활을 감수했다. 선조는 어진이를 등용하고 당파싸움을

    조정하려 했으나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았으며 정치기강이 문란한 틈을 타서

    1583년과 1587년의 두 번에 걸쳐 여진족의 침범을 받는 등 늘 골머리가 아팠다.

     

    그러다가 선조 24년 세자 책봉문제로 동인과 서인이 서로 싸웠는데 서인이 모두

    쫓겨났다. 서인의 영수는 정철인데 이 세자 책봉문제로 왕의 노여움을 사고 파직

    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정철의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자는 계함

     

    (季涵)이며 호는 송강(松江)이다. 한양에서 태어났는데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에게 글을 배웠다. 장성하자 율곡과 우계 등과 친교를 맺고 서로 존경했다. 송강은

    인종의 후궁이었던 맏누이와 계림군(桂林君)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 덕분으로 대궐

     

    에도 출입하여 아직 어렸을적의 명종과 친숙해졌다. 명종 원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 아버지가 귀양을 가자 따라갔다. 명종 6년 특사되어 온 가족이

    고향인 전라도 창평에 이주하여 여기서 김윤제(金允悌)의 제자가 되어 별산 기슭의

     

    송강에서 10여 년 동안 공부하고 하서나 고봉의 훈도도 받았던 것이다. 명종 16년

    진사에 오르고 다음해 문과에 장원했으며 지평(持平), 전적(典籍) 등을 역임했거니와

    명종 21년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율곡과 사가독서 했다. 선조 원년 교리, 수찬이

     

     되었으나 선조 8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갔다. 선조 11년 직제학을 거쳐 승지

    가 되었는데 이때 진도군수의 뇌물사건으로 동인의 공격을 받아 사직했다. 선조 13년

    강원도 관찰사로 다시 등용되어 임지에 부임했는데 이때 최초의 가사 ‘관동별곡’은 금

     

    강산을 비롯한 관동 8경을 죄다 다니며 산수를 노래하고 고사와 풍속까지 삽입한 것

    이며, 훈인가는 포고문이나 유시문을 알기쉽게 시조의 형식을 빌려 지은 것이다. 이

    무렵 정철이 함경도 일대를 순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루한 옷차림으로 통천(通川)

     

    의 총석정(叢石亭=해금강의 일부)에 올라 술을 마셨다. 이튿날 잠이 깬 송강은 주인

    집 아이에게 “내가 10년 뒤에는 당당히 감사가 되어서 올 것이다.“라고 하자 그 아이

    의 말이 ”감사는 높은 벼슬이고 아무나 못하니 그보다도 찰방(察訪=6품 벼슬)이 되어

     

    오도록 해요.“라고 하였다. 그 뒤 정철은 관찰사가 되어 그 지방을 순찰하면서 그 아이

    를 찾아보니 별고 없이 잘 지내고 있어 시를 한 수 지어 주었다. 이 이야기는 송강의

    성격이 매우 다감했던 시인적 일면을 가졌음을 증명한다. 선조 16년 예조판서가 되고

     

    이어 형조판서를 역임, 동 17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들의 공격으로 고향에 돌아가

    4 년 간 엎드려 있을 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사미인곡, 성산벽곡(星山別曲) 등을

    지었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는데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정여립은 자를 인백(仁伯)이라 했는데 그는 율곡에게 글을 배웠다. 명종 10년 진사에

    올랐고 선조 원년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이 되었다. 율곡이 서거하자 서인에 동정적인

    율곡과는 달리 동인을 두둔하는 태도를 보이자 선조의 눈에 벗어났다. 이리하여 파직

     

    당하고 향리인 전주에 돌아가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러자 선비들이 많이 주변에

    모여들고 죽도선생(竹島先生)이라 불렀다. 그는 태인(정읍)을 중심으로 대동계(大同

     契)를 모았는데 여러 무인 및 천민들도 다수 참가했다. 이것이 모반으로 발각되어

     

    선조 22년 수백 명이 죽게 되었는데 모반 여부는 분명치가 않다. 어쨌든 송강이 이때

    동인에 대한 대숙정을 감행했으며 그 뒤 전라도 일대를 이른바 반역향(反逆鄕)이라

    하여 등용을 제한받았다. 송강은 이 공로로 좌의정이 되었는데 선조 24 년 세자 책봉

     

    문제가 일어나자 송강은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선조의 정비의 인왕후는 소생이

    없었고 공빈(恭嬪) 김씨가 임해군과 광해군 등을 낳았는데 임해군은 이미 나이가

    많고 주색에 빠져 있으므로 광해군을 권했던 것인데 이것이 왕의 노여움을 사 송강은

     

    파직이 되고 강계로 유배되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죄가 풀려 명나라로

    구원군 교섭 차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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