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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름 모르는 이들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21. 23:37

    벽상의 칼이 울고 胸中의 피가 뛴다

    살 오른 두 팔목이 밤나즤 들먹인다

    時節아 너들아 오거든 왓솟 말을 하여라

                           ~이름 모름~

    <해설>

    벽에 걸어 둔 칼이 쓰일 날을 기다리며 소리 내고, 이 내 가슴

    속에서 끓는 피가 뛰고 있다. 살이 올라 기운이 샘솟듯 팔뚝이 언제나

    움싯 거리는구나, 시절아 내가 이 칼을 들고 활약할 때가 돌아오거든

    지체 말고 이르렀다고 알려다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터니

    내 심은 타신디 기다려도 아니오고

    無心한 一片 明月이 뷘 가지에 걸녀셰라

                                 ~이름 모름~

    <해설>

    벽오동나무를 심은 내 뜻은 봉황새를 보고자 함이었는데, 내가심은

    까닭이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니 오고 그 대신 말 없는 한 조각

    초승달만이 빈 가지에 걸려 있구나.


    넙으나 너른 들회 흐르느니 물이로다

    人生이 뎌르로다 어드러로 가는데오

    아마도 도라올 길히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이름 모름~

    <해설>

    넓으나 넓은 들에 흐르느니 물이로구나 우리 인생도 저러한데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 인생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올 줄 모르니 그를 슬퍼할 뿐이다.


    ◈ 배경

    명종은 보우(普雨)를 등용하여 승과(僧科) 제도를 부활했다. 이태조가 숭유배불(崇儒

    排佛) 정책을 씀으로서 이씨조선에 들어와서 불교는 크게 쇠퇴했다. 그러나 그 전통

    이 가늘게나마 이어졌고 때로는 크게 발전했던 것이다. 무학대사가 태조의 즉위식에

     

    참여하고 한양 천도를 건의함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국초의 정도전 등이 주장한

    배불정책에 의해 크게 위축되었으나 세조의 원각사 조영(造營)으로 다시 활기를 띠었

    던 것이다. 수미(守眉) 스님은 세조의 왕사(王師)로서 나이 열 셋에 출가하녀 월출산

     

    (月出山) 도갑사(道岬寺)에서 수도했는데 해인사 대장경 50벌을 간행하여 각 사찰에

    분장한 일은 유명하다. 보우는 호를 뢰암(瀨庵)으로 인제의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의

    스님이었는데 강원관찰사 정만종(鄭萬鍾)의 추천으로 문정왕후 윤씨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보우대사를 배척하는 소리가 성균관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문정

    왕후의 후원으로 승과를 새로이 부활시키고 도첩(度牒=승려의 신분증)을 발행케 하

    여 출가를 공허(公許하는 길과 학승(學僧)의 양성의 길을 텄던 것이다. 이어 정릉의

     

    봉은사(奉恩寺)주지가 되어 팔도에 흩어진 선(禪), 교(敎) 양종의 교풍을 크게 진작했

    으며 불교 부흥에 공을 세웠으나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요승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동년 7월 귀양을 갔고 목사 변협(邊協)에게 장살(杖殺) 되었다.

     

    그러나 그를 요승이라고 봄은 너무나 가혹한 일로서 그의 문하에서 사명대사(泗溟大

    師) 같은 분이 나왔던 것이다. 문정왕후가 돌아가자 ‘소윤’도 몰락한다. 을사사화를 일

    으킨 윤원형은 대사헌 이탁(李鐸)의 탄핵을 받자 그의 향리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그의 애첩 난정(蘭貞)이 자결하자 그도 따라서 음독 자살을 했다. 또 윤원형의 당인

    이파(李芭;1476~1550)는 본관이 덕수(德水)이고 자는 문중(文仲), 호는 경재(敬齋)

    였다. 연산 7년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이 높아 사람마다 재상의 그릇이라고 하였다.

     

    대사헌 이언적(李彦迪)이 그의 재능을 아끼고 적극 밀어주었는데 뒤에 그의 성격이

    음흉하고 부정함을 알고서 후회했다고 한다. 명종 원년 좌의정이었는데 윤원형과

    손잡고서 대윤 일파를 몰아 죽였으므로 세상에서 그와 윤원형을 가리켜 ‘이흉(二凶)’

     

    이라 했고 김명윤(金明胤), 안세우(安世遇)를 이사(二邪)라 불렀다. 일찍 죽었으므로

    탄핵은 받지 않았으나 훈작이 모두 깍이고 무덤의 비석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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