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이황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22. 02:07

    淳風이 죽다 하니 眞實로 거즈마리

    人性이 어디다 하니 眞實로 올흔마리

    天下에 許多英才를 소겨 말솜할가


    <해설>

    순박한 풍속이 죽어 없어졌다 하는데 이는 참으로 거짓된 말이다.

    인간의 성품이 어질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한데

    세상에 많은 뛰어난 사람들을 속여서 말할 수가 있겠는가?


    愚夫도 알며 하거니 긔 아니 쉬운가

    聖人도 몯다 하시니 긔 아니 어려운가

    쉽거니 어렵거낫 중에 늙는 주를 몰래라


    <해설>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알며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성인이라도 다하지 못하는 법이므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이렇듯 쉽고도 어려운 것이 학문이긴 하지만 쉽든 어렵든 학문을

    닦는 생활 속에서 늙는 줄을 모르겠다.


    古人도 날 몯 보고 나도 古人 몯뵈

    古人를 못 봐도 녀던 길 알픠 잇늬

    녀던 길 알픠 잇거든 아니 녀고 엇덜고

                           ~이황(李滉;1501~1570)

    <해설>

    옛 성현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 역시 옛 성현을 뵙지 못했네, 그러나 옛

    성현을 뵙지 못했다곤 하지만 그 분들이 행하던 길이 앞에 있는 것이다.

    그 걸으신 길이 앞에 있는데 어찌 행사지 않겠는가.


    ◈ 배경

    심의겸(1535~1570)은 관향이 청송(靑松)으로서 자는 방숙(方淑), 호는 선암(選庵)

    인데 영의정을 지낸 연원(連源)의 손자였다. 그리고 명종의 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의 동생으로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대사헌에 올라 있었다. 또 김효원(金孝元;

     

    1542~1590)은 본관이 선산이며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성암(省庵)인데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등에게서 배웠다. 그는 명종 19년 진사에 올랐고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

    감, 부사 등을 지냈다. 그런데 이 분이 심의겸과 서로 원한을 갖는 터였었다. 명종이

     

    재위 22년으로 1567년 승하하자 수가 34세였는데 후사가 없어 중종의 왕자인 덕흥대

    군의 세 째 아들을 유명으로 모셔다가 왕으로 옹립했다. 제 14대 선조(宣祖)인데 이

    선조대왕 초 당파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애당초 심의겸은 퇴계, 우계

     

    같은 당대의 거유(巨儒)와 교류가 있고 신망도 높던 정치가였다. 선조 초 이조참의

    라는 요직에 있었다. 이조는 잘 알다시피 관리의 인사를 관장하는 관서로서 참의는

    높은 벼슬은 아니었으나 이조의 실무를 관장하는 포스트였다. 그러던 차 김효원의

     

    명망이 높아 이조전랑(吏曹銓郞)으로 추천하는 사람이 있었다. 전랑은 글자 그대로

    사람을 가린다는 인사 관리로서 정랑(正郞)과 같으며 정 5품이었고 참의는 정3품으로

    서 당상관이다. 그런데 심의겸이 김효원의 이조전랑 임명을 반대했다. 이유는 그가 외

     

    척으로 전횡을 일삼은 윤원형의 집에 자주 드나들은 일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효원의 정랑 임명은 좌절되었다. 그런데 몇 해 뒤에 이번에는 의겸의 아우 충겸(忠

    謙)이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는데 외척이라는 이유로 효원이 이것을 반대했다. 선조

     

    8년의 일이다. 이리하여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비로소 생겼는데 의겸의 집이

    대궐 서쪽 지금의 정동(貞洞)에 있었으므로 서인이라 불렸고, 효원의 집은 낙산(駱山

    =지금의 종로 5가 근처) 밑에 있었으므로 동인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황은 본관이

     

    진보(眞寶)로서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이다. 5형제의 막내로 불행히 생후

    7 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삼촌인 송재(松齋) 우(堣)에게 글을 배웠다. 23세 때 대

    학(大學)에 들어가 여기서 김인후(金麟厚)를 만났고, 중종 23년 진사에 오르고 동 29

     

    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관 부정자로부터 호조참의랑에 이르렀는데 그동안 김안로

    (金安老) 일파의 미움을 받아 여러 번 벼슬을 내놓기도 했다. 37세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삼년동안 복을 입고 안로가 쫓겨나자 옥당(홍문관)에 들었는데 다시 벼슬을

     

    물러났다. 그리고 1570년 역동서원(易東書院)에서 선비들을 모아 심경(心經)을 강의

    했으며 또 도산서당(陶山書堂)에서는 계몽심경을 강의했다. 그리고 이해 11월 향년

    70세로 세상 을 떠났다.

     

    蕭簫草蓋屋 上雨以旁風 就燥屢種狀 叛書故萊中

    (보잘 것 없는 초가 오막살이 위로는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치네

    바른 곳을 찾아 가구를 자주 옮길제 서적은 헌 상자 속에 거두워라.)

     

    이 시는 바로 퇴계 선생이 학문에 몰두하던 한서헌의 풍경이다. 일찍이 명천군수

    허시(許時)가 이 서재를 보고 놀라며 “이처럼 좁고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견디는가“

    하고 묻자 퇴계는 ”오랜 습과이 되어서 그런지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평소의 생활도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세수는 돌그릇을 쓰고 부들자리와 포의

    (布衣), 칡으로 만든 신과 죽장을 짚는 차림이었다. 서울 서소문 안에서 살 때 좌의정

    권철(權轍)이 찾아와서 식사를 한 일이 있는데 음식이 너무 초라한 소찬 뿐이라 수저

     

    를 들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이르기를 “스스로 입맛의 버릇을 잘못 길러 참으로 부끄

    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명종은 임금이 되자 퇴계를 스승으로 우러러 높은 관직에

    나오도록 청했으나 듣지 않으므로 “어진이를 부르나 오지 않음을 탄식하노라(招賢

     

    至歎)” 이란 글 제목을 유신들에게 주어 글을 짓게 했으며,화공을 퇴계의 은거지며

    생지이기도 한 안동 예안에 있는 도산에 보내어 산수의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

    고 당시의 명필 송인(宋寅)을 시켜 퇴계의 도산기(陶山記)와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쓰

     

    도록 하고 그것을 병풍으로 만들어 거처하는 방에 두며 사모하는 정을 풀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주자절요(朱子節要), 계몽전의(啓蒙傳疑), 자성록(自省錄) 등이 있다. 또 그

    문하에서는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이산해(李山海), 정탁(鄭琢), 기대승(奇

    大升) 등이 있다.

    '한 자 > 한시(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섬의 시  (0) 2009.03.22
    조식의 시  (0) 2009.03.22
    주세붕의 시  (0) 2009.03.22
    이름 모르는 이들의 시  (0) 2009.03.21
    송순의 시  (0) 2009.03.21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