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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굉필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19. 22:57
삿갓에 되롱이 닙고 細雨中에 호믜 메고
山田을 흣매다가 錄陰에 누어시니
牧童이 牛羊을 모라 잠든 날을 깨와다
~김굉필(金宏弼;1454~1504)
<해설>
삿갓 쓰고 도롱이 입고 가랑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호미를 들고
산 속의 밭을 매다가 나무 그늘에서 잠간 쉬었는데 어느덧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을 잤는지 목동이 몰고 가는 소와 염소의 울음소리를 듣고 문득
잠을 깨었다.
◈ 배경
김굉필은 점필재, 김종직 문하의 수재로서 학자이다.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
(大猷), 호는 한휜당(寒暄堂). 그는 한양의 정릉에서 태어났는데 젊었을 때는 망나니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성격이 호탕하고 고집이 세었으며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비실비실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학문에 뜻을 두자 남달리 노력하고 당시의 학자
가 주고 문장을 논하고 그 학문이 어떠니 하고서 떠들 때 실천과 학구적 탐구를 주로
하는 성리학(性理學)에 힘썼다. 그리하여 벼슬이 형조좌랑이 되었는데 연산군 4년 무
오사화가 일어나자 희천(熙川)으로 귀양을 갔다. 무오사화는 남이 장군을 무고한
유자광이 당시 병조판서로서 사림파를 미워하고 있었는데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
帝文)을 발견하고 트집을 잡아 무고한 사건이다. 연산군(燕山君)도 서거정(徐居正)
에게 수학한 터였었는데 걸핏하면 상소문이나 올리는 사림파를 미워하고 있던 차라
일대의옥을 일으키게 되었다. 김종직은 이미 사망하고 없었는데 그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의 목을 자르고 천양(泉壤)의 화를 당했으며 그의 문하생은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 사화로 희생된 명사로서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본관이 김해
인데 자는 계운(季雲)이고 호는 탁영(濯纓)이었다. 성종 17년 생원, 진사과에 장원
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이조정랑에 이르렀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여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세조 찬위(纂位)의 여러 가지 불의와 훈구파 학자의 불미스
런 일을 기록했는데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그의 형님 준손(駿孫), 기손(驥孫)과 더불
어 화를 입었다. 향년 35세였다. 정여창(鄭汝昌;1450~1504)은 본관이 하동인데 자를
백조라 했고 호는 일두(一蠹)였다. 그의 아버지 육을(六乙)은 함길도 병마 우후(虞候)
로서 이시애의 난 때 전사하였으므로 일찍부터 홀어미 아래서 자랐으며 힘써 공부하
였다. 그리하여 성종 11년 왕이 성균관에 명하여 명경(明經=과거이 시험과목 하나 주
로 경서의 내용을 공부하는 것) 학생을 모집할 때 서거정의 추천으로 선발 시험 제
1위로 뽑혔다. 그러나 나가지를 않고 어머니의 봉양에 힘쓰며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지리산에 들어가 은돈생활을 꾀했으며 성종 21년
이조참의 윤궁(尹兢) 등이 “정여창의 학식과 효행은 타인의 모범이 된다.“하며 소격
서(昭格署) 참봉으로 추천했으나 역시 사양했다. 그러다가 이해 겨울 별시(別試)에
올라 예문관 검열이 되고 성종께서 손수 술을 내리시자 그는 고개를 조아리고 “신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음주를 책망했으므로 금주를 맹세하였습니다. 지금 성은이
망극하여 술을 내리시나 감히 받들지 못하겠읍니다.“하고 사양했다. 이렇듯 학문도
학문이려니와 효성이 지극했던 것이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그는 함경도 종성(鍾城)
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도 후진 양성에 힘썼고 절도사 이윤검(李允儉)의 아들
희증(希曾)은 불과 2년의 수학으로 등과 하였다고 한다. 저서로 용학주소(庸學주疏),
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 등이 있었는데 사화가 일어나자 불태워 버렸다. 또 유호인
(兪好仁;1445~1494)은 성종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지내고 합천 군수에 이르렀
는데 어머니가 늙자 봉양을 위해 벼슬을 사직했다. 사화가 일어나기 전에 돌아갔으나
천양의 화를 입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