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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이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19. 19:04

    長劍을 빼어 들고 백두산에 올나 보니

    一葉 제잠이 胡越에 잠겨세라

    언제나 남북 풍딘을 헤처 볼고 하노라


    <해설>

    긴 칼을 빼어 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조그마한 우리나라가

    북호와 남월의 사이에 감겨 있구나, 언제고 이 남북의 풍진을

    쓸어버리고 천하를 평정해 볼까 하노라.


    烏騅馬 우는 곳에 七尺長劍 비꼇는듸

    百二山河는 뉘 따히 되닷 말고

    어즙어 八千弟子를 언의 낫츠로 볼연요


    <해설>

    항우의 오추마가 우는 곳에 일곱 자나 되는 큰 칼을 비껴들었는데

    험준하여 백이산하라고 일컬어진 진나라의 옛 땅은 누구의 땅이 되었단

    말이고 그뿐인가 전쟁에 지고 8천의 강동 건아들도 모구 죽고 말았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그들의 부형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남이(南怡;1441~1468)~

    <해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사나이 이십대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한다면 후세의 누가 대장부라

    할 것인가.


    ◈ 배경

    태종의 외손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곤이었다. 어머니는 태종의 넷째

    따님 정선(貞善) 공주였다. 그가 아직 떠꺼머리총각일 때 시골 농삿군인듯 싶은 사

    이 보자기로 싼 짐을 지고 큰길을 지나고 있었다. 남이가 보니까 그 하얗게 싼 짐 위

     

    에 분을 희게 바르고 눈이 토끼눈처럼 빨간 여자 귀신이 하나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뒤쫓아 갔는데 그 농군은 어느 높은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남이가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니까 이윽고 하인들이 분주히 드나들고 여자들의 곡

     

    성이 들렸다. 그래서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하인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예

    이댁 작은 아기씨가 갑자기 돌아 가셨습니다.” 남이는 아까 그 귀신의 짓이구나 얼른

    집작하고 “내가 살려 줄테니 그 방으로 안내해라”하고 말하자 그 집에선 처녀의 방에

     

    비록 죽었다 할지라도 외간 남자를 들일 수 없다 하고서 망설였으나 남이의 신분을

    알고 허락했다. 남이가 들어가 보니까 아까 보았던 그 흰 분칠한 얼굴에 토끼눈의

    여자 귀신이 한 아리따운 처녀의 젖가슴을 꽉 눌러가며 앉아 있다가 남이를 보자

     

    벌벌 떨며 어디론가 도망쳤다. 그러자 죽었던 처녀가 부시시 눈을 뜨고 살아났다.

    그런데 남이가 밖으로 나오자 처녀가 또 죽고 들어가면 살아나므로 남이는 그 집

    주인에게 시골 농삿군이 가져온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물건은 연시로 처녀가

     

    연시를 먹고 갑자기 체해 죽었던 것이다. 남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가 귀신을 본

    이야기를 하고 약을 쓰면 될 거라 했다. 이리하여 그 처녀는 죽을 목숨을 살게 되었

    는데 좌이정 권람(權擥)의 딸이었다. 권람이 남이를 사위로 삼을 생각이 있어 점장이

     

    에게 물었더니 “장차 귀하게 되겠으나 무고하게 죽을 운이라“하였다. 그래서 망설였

    지만, 딸의 사주를 보니까 ”역시 단명하고 자식도 없겠으나 귀하게 되리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리하여 권람은 남이를 사위로 삼았다는 것이다. 남이는 어려서부터 기운이

     

    장사이고 무예가 뛰어 났었는데 호탕한 성격을 외조부 태종으로부터 물려받았다.

    나이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21세에 장군이 되었으며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했고 또 명나라의 요청으로 건주위(建州衛)의 여진을 치기도 했다. 이 공

     

    으로 병조판서가되고 공일등을 세조에게 받게 되었는데 한명회의 시기를 받았다.

    한명회도 황해, 평안, 함길도의 체찰사를 거치고 병조판서로 있었는데 남이의 공이

    너무나 혁혁하여 자기 지위에 위협을 느꼈던 모양이다. 마침 세조가 승하하고 그의

     

    딸이 왕비인 제 8대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간신 유자광(柳子光)을 시켜 남이를 무고

    했던 것이다. 남이는 너무 억울했으나 자기를 감싸줄 권람은 이미 3년 전에 죽었고

    명회 뿐 아니라 당시의 영의정 정인지까지 여기에 가담하였으므로 억울하게도

     

    신이란 누명을 쓰고 형사(刑死)했다. 향년 28세였다. 유자광이 남이의 시 男兒二

    國을 男兒二十未國이라고 고쳐 무고했다고 하는데 딴 이유가 있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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