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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19. 19:10
가더니 니즌 양하야 꿈에도 아니 뵌다
엇던 님이 현마 그 덧에 니졋시라
내 생각 아쉬운 젼차로 님이 탓을 삼노라
~이름 모름~
<해설>
한 번 떠나가시더니 아무 소식도 없어 나를 잊으셨는가, 꿈에라도
아니 보이네 그렇긴 하지만 어떤 님이 설마 그 동안 나를 잊기야
하셨을라구 다만 내 생각이 아쉬운 까닭으로 님의 탓으로 돌려
원망할 뿐이네.
츄강의 밤이 드니 믈결이 차노매라
낙시 드리오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믈빗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월산대군(月山大君;1455~1489)~
<해설>
가을 강에 밤이 찾아오니 물결도 차가와 지는구나, 낚시를 드리우고
있지만 고기는 물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감정 없는 달빛만 가득
싣고서 빈 배로 돌아올 뿐이다.
◈ 배경
이씨조선 제 8대 예종은 불과 재위 1년으로 숭하를 하였다. 그러자 세자였던 덕종의
둘째 아들이 대비 정희(貞熹) 왕후의 수렴정정(垂簾聽政)을 받으며 열 세 살의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었다. 제 9대 성종(成宗)이다. 수렴청정이란 왕대비가 어린 임금을
대신하여 발을 늘어뜨리고 신하의 정치를 듣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정희왕
후는 불도에 귀의하고 있어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자연히 권신이 날뛰기 마련
이다. 한명회는 이때 영의정으로서 그의 딸이 예종의 비였고 또한 성종의 비도 명회의
딸이었다.한편 월산대군은 이름이 정(婷)으로서 덕종의 장자, 바로 성종의 형님이다.
나이도 15세였는데 할머니인 정희왕후의 명이라지만 동생이 자기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으니 인간인 이상 그의 속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어쨌던 일단 왕위 계승의 코오
스에서 벗어나면 재상집 아들만도 못한 게 왕족의 슬픈 운명이었다. 월산대군도 인간
이니만큼 “아버님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하는 아쉬움이 그 마음속 깊이 숨겨
있었을 게 틀림없다. 월산대군은 문장에 뛰어 났는데 결국 이와 같은 한(恨)을 품고
풍류를 즐기다가 35세로 일찍 죽고 만다. 술과 여자를 지나치게 가까이 해서 수명을
단축한 것이다. 성종대왕 초 아직도 사육신의 기억이 생생한 때이다. 불과 13년 밖에
안 되었으니까 그리고 이때는 이미 건국 초기의 발랄한 기풍이 사라지고 부패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부패를 가져온 것이 공신들의 자제였다. 이들은 재주가 없이도
단지 그의 부조(父祖)가 공신이었더는 조건 하나만으로도 과거에 쉽사리 급제하고
관계로 나갔다. 이들을 훈구파(勳舊派)라 하는데 이 훈구파를 미워하는 선비들, 즉
사람파(士林派)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림파는 유교의 정신을 신봉하고 그 충효 사상
과 백이, 숙제와 같은 절의(節義)를 숭상하는 터이다. 당연히 훈구파와 충돌을 가져
오게 된다. 이것이 나중에 생기는 사화(士禍)라는 이름의 비극이다. 사림파의 시조는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다. 김종직은 본관이 선산인데 자는 계온(季昷)이다.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소시적부터 학문을 좋아했는데 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
이 형조판서까지 올랐다. 그는 야은 길재(吉再)의 학풍을 이어 받았다고 하는데 그
학문과 문장이 과히 당대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이었다. 성종의 신임도 두터
웠고 그와 그의 제자들이 중용(重用)되었다. 그의 제자로서 이름난 사람을 열거하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조위(曹偉), 남효
온, 홍유손(洪裕孫), 이종준(李宗準) 등이 있다. 점필재는 단종의 비극을 항상 한탄
하고 그의 학문상 단종에게 동정적이었는데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글을 썼다.
의제는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을 가리키는데, 그는 신하인 항우엥게 시역된 왕이
었다. 즉 단종은 회왕으로 비유하여 그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던 것이다.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발단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