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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씨 들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21. 01:24
간밤에 지게 여던 바람 살드리 날 속여다
風紙 소리에 님이신가 반기온 나도 의다마는
진실로 들나곳 하더면 밤이조차 우을낫다.
~이름 모름~
<해설>
어젯밤에 문 열던 그 바람 살뜨리도 나를 속였구나, 문풍지 소리에
임이 나를 찾아온 소리인가 잘못 알고 반가워서 문을 열고 나가본
나도 틀렸다 하겠지만, 만일 정말 임으로 알고서 어서 들어오시오
하고 말까지 했더라면 그야말로 밤마저도 나를 비웃었겠지.
갈길히 머다 하나 뎌 재 넘어 내 집이라
細路 松林의 달이조차 도다 온다.
가득의 굴먹는 나귀를 모라 므삼하리
~이름 모름~
<해설>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저 고개 하나면 넘으면 내 집이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자. 오솔길 소나무 밭 사이로 이제 달까지 떠올라 와서
길을 비쳐주고 있지 않느냐 그렇지 않아도 잘 먹이지 못하여 여윈
나귀를 무엇이 급하여 그리 급하게 올 필요가 있는가.
그려 사디 말고 차라리 싀여뎌셔
月明空山의 두견새 넉시 되어
밤중에 사라져 우리 님이 귀에 들리리라
~이름 모름~
<해설>
애타게 그리워하며 살지 말고 차라리 죽어서 달 밝은 산속의 두견새
넋이나 되어 밤중에만 피나게 소쩍소쩍 울어 임의 귀에 들리게 하리라.
나뷔야 靑山 가자 범나뷔 너도 가자
가다가 저므러든 고즤 드러 자고 가쟈
고제서 푸대접하거든 닙혜셔나 자고 가자.
~이름 모름~
<해설>
나비야 청산에 가자 범나비 너도 함께 가자꾸나,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러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을 하면 잎에서라도 자고가자.
◈ 배경연산군(燕山君);1476~1506)은 처음에 결코 포악한 군주가 아니었다. 성종의 장자
로서 성종 14년에 책봉되었고 당대의 석학 서거정에게 배웠다. 왕비는 영의정을 지낸
거창부원군 신승희(愼承喜;1436~1502)의 딸 이었다 신승희는 자를 원지(元之)라 했
는데 세종대왕의 세 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사위였다. 단종 때 18세로 사마
(司馬)가 되었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에 올랐다. 성종 20년 그 딸로 세자빈
을 삼자 거창부원군이 되었고 연산주가 즉위하자 우의정에 올랐으며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벼슬을 사임하고 병이라 칭하고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신승희는 임금의 장인인 국구(國舅)로서 세도를 부리고 싶지 않았던 것
이다.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은 그를 가르켜 못난이라고 불렀으나 권세와 재물에 담백했
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아들 신수근(愼守勤)과 임사홍(任士洪)이 등장한다.
연산군은 즉위 후 녹도(鹿島)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했고 건주(建州)의 여진족을 토벌
또는 회유하는 등 외치에 업적이 있었고 내치로 사창(社倉) 상평창(常平倉), 진제장
(賑濟場)의 설치를 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또 신하로서 공부할 기회를 주는 사가독
서(賜暇讀書) 제도의 부활 국조보감, 동국명가집의 간행 등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런
데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다시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갑자사화란 무엇인
가? 먼저 임사홍(1445~1506)부터 알아봐야 한다. 사홍은 풍천 임씨로 자를 이의(而
毅)라 하였으며 사우당(四友堂) 원준(元濬)의 아들이다. 임사홍의 가문은 고려 때부터
의 명문이며 그 아버지 원준은 일찍이 세종대왕도 감탄한 시인, 학자였다. 세조 때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고 선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졌다.
한편 드 아들 사홍은 세조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에 올랐는데 벼슬이 이조
판서였다. 사홍은 특히 글씨를 잘 썼으며 고양군에 있는 월산대군 묘비문은 그의 필적
이었다. 뿐아니라 그의 아들 희재(熙載)는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무오사화 때의 부마
이고, 숭제(崇載)는 성종의 부마인 혁혁한 집안이었다. 그런데 입을 한 번 잘못 놀렸
던 것이다. 성종 10년 연산의 생모 폐비 윤씨가 성격이 교만하고 투기심이 강하다는
이유로 궁중에서 쫓겨나고 마침내 죽음까지 당했다는 사실을 연산에게 알려주었던 것
이다.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그야말로 분노가 하늘 끝까지 치밀었다. 당시 폐비를 주
장한 신하는 물론 이러쿵 저러쿵 상소를 한 사림파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주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이때 김굉필은 순천으로 옮겨 있었으나
거기서 죽음을 당했고 정여창 또한 종성에서 유배 7년 만에 피살되었다. 권주(權柱;
1457~1505)는 다를 지경(支卿)이라 하는데 성종 11년 문과에 2등으로 급제, 벼슬이
충청, 경상관찰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승정원 주서(注書)로 있을 당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갔다는 죄로 해평(海平)에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했다. 본관이 고령인
박은(朴誾)은 연산 원년 진사가 되고 다음해 문과에 급제했는데 이때 18세였다. 그는
유자광을 탄핵했는데 갑자사화에 걸려 동래에 유배되고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고문
을 당하다 죽었는데 어떤 이는 그를 가리켜 이씨조선 5백년을 통한 제일가는 시인
이라고 한다. 성준(成俊)은 자를 시좌(時佐)라 하였는데 세조 원년 사마가 되고 동
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이 즉위하자 사간원 사간에 올랐다. 이때 윤비를 폐출하는
문제에 관련되어 연산 때 영의정까지 올라 있었으나 직산(稷山)에 유배되고 이어 두
아들 중온(仲溫), 경온(景溫)가 더불어 화를 입었다. 성현(成俔)은 자를 경숙(磬叔),
호를 용재(傭齋)라 하였는데 세조 8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24년 유자광과 악학궤
범(樂學軌範) 전 6권을 저술하였다. 연산주 9년 세상을 떠났는데 역시 폐비 사건에
관련되어 천양의 화를 당하였다. 조위(曺僞 ;1454~1503)는 본관이 창녕이고 자를
태허(太虛) 호를 매계(梅溪)라 하는데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고 처남이었다. 성종
5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무오사화 때 명나라로 사신을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이 소식을 들었으며 연산군이 당장 참하라는 엄명을 내렸으나
우의정인 이극균(李克均)이 만류하여 간신히 목숨만 살고서 의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순천으로 옮겨졌으나 곤장을 맞은 병이 도져 적소(謫所)에서 죽었으며 갑자
사화 때 천양의 화를 입었다. 그를 구해주었던 이극균도 이 사화에 연루되어 인동(仁
同)에 안치되었다가 약사발을 받았다. 연산군은 무오,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인격이
완전히 변하였다. 그 황음과 망발은 극도에 달했는데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드는가
하면 사간원의 폐지, 경연(經筵)의 폐지, 원각사를 부수는 등등이 그것이었다. 홍문
관 겸 예문관 제학 표연말(表沿沫)은 본관이 신창(新昌)으로서 자는 소유(少游), 호는
남계(濫溪)였다. 그는 김종직의 문하로서 성종 3년 생원, 문과, 중시에 연거푸 급제한
수재였다. 갑자사화를 일으킨 임사홍은 연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과 세도를 누렸
다. 신수근은 자를 경지(敬之), 호를 소한당(所閑堂)이라 했는데 영의정을 지낸 승희의
아들이었다. 연산군 11년 그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있었다. 하루는 유순정(柳
順汀),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이 사람을 보내어 “지금 종사(宗社)가 위급
하니 매부와 사위 중 누가 중한고?“하는 편지를 전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고 하면 공
교롭게도 신수근의 딸이 진성대군(晋城大君)의 부인이었다. 수근은 이때 “세자가 영
명하시니 이는 의뢰할 분이시다.”하고 대답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신
수근은 그의 아우 유수(留守)인 수겸(守謙)과 판서인 수영(守英)과 함께 주살되었다.
비극적인 것은 그의 딸 신씨로서 출가한지 8년 남편 진성대군이 중종이 되자 신하들
에 의해 폐비가 되었던 것이다. 박원종, 유순경, 성희안 등에의해 연산군이 축출되고
진성대군이 옹립되자 이 분이 제 11대 중종(中宗;1488~1544)이다. 중종은 성종대왕
의 제 2자로 연산주와는 배다른 동생이었다. 연산군 11 년(1506) 경기관찰사인 박원
종(朴元宗;1467~1510)이 주동이 되어 아무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해있는 연산을 강화
에 추방하였으며, 연산은 그곳에서 죽었다. 박원종은 본관이 순천으로서 자를 백윤
(伯胤)이라 하였는데, 일찍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며 성종의 신임을 받았
다. 이어 연산군 때도 신임을 받아 경개관찰사가 되었는데 왕의 실정을 보다 못하여
궐기하였던 것이다. 이 공로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중종 5년 향년 44 세
로 죽자 무열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반정의 삼훈(三勳)의 하나인 성희안(成希顔)은
자를 우옹(愚翁)이라 했고 호를 인재(仁齋)라 했다. 그는 1461년 생으로 성종 11년 생
원에 오르고 동 16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반정 당시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이었다. 중종을 영립하자 그 공으로 공신이 되고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박원종이 죽자 영의정을 지냈는데 중종 8년 향년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삼훈의 또 한사람인 유순정(柳順汀;1459~1512)은 본관이 진주로서 자는 지옹(智翁)
이라 했다. 성종 18년 문과에 급제하여 연산군 때 평안관찰사까지 올랐는데 반정을 일
으킨 뒤 우의정에 올랐다. 특히 삼포(三浦)에서 왜인이 소란을 피웠을 때 도원수로서
이들을 평정했고 중종 8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리고 이 해에 주겄는데 문성(文成)이라
는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