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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방연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18. 20:22

    천만리 머나먼 길해 고은 님 여희옵고

    내 마음 둘듸 업서 냇가에 안자이아

    뎌 물도 내 안 갓하야 우러 밤길 네놋다.

                            ~왕방연(王邦衍)~

    <해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을 이별하옵고 이 내 슬픈 마음을

    어디 둘데가 없어서 흐르는 물가에 하염없이 앉아 있나이다.

    저 물도 내 마음속 같아서 울면서 밤길을 졸졸 흘러가는구나.


    ◈ 배경

    세조 때 금오랑(金吾郞)으로서 노산군을 영월까지 호송했다가 돌아와 이 시조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애군(愛君)의 정성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생몰연대가

    아깝게도 전하지 않고 있다. 세조는 단종에 대해서만은 지나치게 가혹했던 것 같다.

     

    세조에게는 4남 1녀가 있는데 장자는 20세로 세조 3년 갑작스럽게 죽었다. 이아들이

    추증되어 덕종(德宗)이라 하였는데 이 갑작스런 죽음이 낭설을 낳았다. 즉 세조가

    악몽을 꾸었는데 꿈에 문종의 비 현덕왕후가 나타나 “네가 내 자식을 죽게 하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게 하리라“하고 호령을 했다고 한다. 세조가 깜짝 놀라 잠을 깨었는

    데 그때 문밖에서 내시가 아뢰기를 “마마 동궁께서..”하고 말을 잊지 못했다. “동궁

    께서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세자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자, 내시는 벌벌 떨며

     

    아뢰는 것이다. “예 매우 위독하시다 하옵니다.” “뭣이” 그러나 세조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덕종이 죽은 뒤였다. 세조는 이를 갈며 분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자기의

    형수이고 왕후인 현덕왕후의 능을 파 헤치고 그 관곽을 빠개어 바다에 띄우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래서 능을 파 헤치게 되었는데 아무리 파도 관이 발견되지 않았다.

    왕가의 능은 이집트의 피라밋 처럼 광대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도굴(盜掘)을 방지

    하기 위해 그 매장이 은밀하고 미로(迷路)처럼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세조 2년 6월

     

    성삼문 등을 주살한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압송하는 한편 현덕

    왕후를 추폐(追廢)하여 서인으로 만들었고 셋째 아우인 금성대군(錦城大君)마저

    순흥(順興)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때 이보흠(李甫欽)이 순흥부사로 부임하였다.

     

    이보흠은 본관이 영천(永川)이고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거사(大田居士)다. 부사

    직(副司直)을 지낸 현보의 아들로서 세종 11년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박사가 되었

    는데 문장력이 뛰어 났었다.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가자 불쾌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어

     

    벼슬을 그만 두려고 했는데 순흥부사가 되었고 거기서 금성대군을 만났던 것이다.

    이들은 곧 세상을 한탄하고 단종을 복위시킬 것을 모의했다. 그런데 기천(基川) 현감

    의 밀고로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으며 금성대군과 여기에 가담했던 영남의 명사들이

     

    모두 희생되었다. 이 바람에 단종은 노산군에서 다시 서인으로 강등이 되었고 세종의

    아들인 한남군(漢南君), 영풍군(永豊君) 등도 멀리 추방이 되었던 것이다. 일이 여기

    까지 이르자 영의정 정인지, 좌의정 정찬손, 이조판서 한명회, 좌찬성 신숙주 등이

     

    단종을 죽일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는 그 치적(治績)에 볼만한 것이

    있었다. 세조 6년(1460) 신숙주를 보내어 여진족을 토벌했고, 1467년 이시애(李施愛)

    가 난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했다. 이시애는 함경도 길주 사람으로 벼슬이 회령부사(會

     

    寧府使)였다. 그런데 북도 사람에 대한 세조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세조 13년 마침내

    반기를 들었다. 세조의 정책은 그때까지 현지인으로 수령 방백을 삼고 있었는데 그들

    차차 줄이고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를 보내었던 것이다. 이시애가 반기를 들자 그

     

    세력은 엄청난 것이다. 함흥 이북의 수령 방백을 질풍 같이 습격하여 이들은 죽이

    계속 남진하려 했으나 관군에게 패하고 그 뒤 사로잡혀 참형을 당했던 것이다. 세조

    는 또 1465년 서울에서 대원각사(大圓覺寺=지금의 파고다공원)를 창립, 간경도감을

     

    두어 불경을 간행토록 했다. 그리고 재위 13년인 무자(戊子)년 9월 8일에 승하했는데

    수가 52세였다(1468). 이어서 예종(睿宗;1450~1469))이 왕위를 이었는데 세조의 제

    2왕자이다. 처음에 해양대군(海陽大君)이었는데 덕종이 죽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비는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이었다. 그러나 이 왕비는 17세로 세상을 떠나고 한백륜

    (韓伯倫)의 딸을 계비로 삼았는데, 예종은 재위 불과 1년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수는 2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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