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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18. 22:45
간밤의 우던 여흘 슬피 우러 디내거다
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우러 보내도다
뎌믈이 거스리 흐르가뎌 나도 우러 네리라
~원호(元昊)~
<해설>
지난밤에 울면서 흘러가던 여울물이 몹시도 슬프게 울며 흐르는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아마도 임의
슬픔을 이 물에 위탁하여 그처럼 애절하게 울게 하였나보다 만일 저
물이 되돌아 거꾸로 흘러 주었으면 나도 그 물에 내 설음을 위탁하여
울어 보내리라.
◈ 배경
단종 사건에 있어 끝까지 절의를 지킨 ‘생육신’이란 것이 있었다. 즉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두문불출을 한 사람들인데 원호, 김기습(金時習), 조여(趙旅), 남효온
(南孝溫),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 등을 말하는데 남효온 대신 권절(權節)을
말하는 이도 있다. 원호는 확실한 생몰연대는 불명이다. 본관이 원주이고 자는 자허
(子虛), 호는 무항(霧巷) 또는 관란(觀瀾)였는데 아버지는 별장(別將) 헌(憲)이었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때 집현전의 직제학(直提學)이었으나 수양의 정난에
불만을 품고 벼슬을 버리고서 고향인 원주에 내려갔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자기
도 그 근처의 서쪽에 작은 암자를 마련하고 아침저녁으로 옛 임금이 있는 곳을 바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암자가 바로 관람정인데 단종이 돌아가자 그 무덤
곁에서 삼년의 상을 입었다. 세조가 호조참의로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김시습(1434~1493)은 본관이 강능이고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이다. 그는
한양에서 태어났는데 세 살 때 시를 짓고 다섯 살 때 중용, 대학을 줄줄 외워서
당시의 사람들이 신동이라 하였다. 세종께서 그 재주를 들으시고 궁중에 불러 시험
했던바 과연 총명하기 이를 데 없으므로 명주 50필을 하사했다고 한다. 또 당시의
재상 허주(許裯)가 다섯 살인 시습을 불러 “나는 이미 늙은이라 老자로 시를 지어
보라“고 하자 老木開花心不老(늙은 나무에서 꽃이 피었으니 그 마음 늙지 않았네)
라고 즉석에서 읊었다.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날 때 그는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소식을 듣자 문을 닫고 사흘동안 나오지를 않더니 마침내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이때 겨우 21세였는데 법명을 설잠(雪岑)이라 칭하고 양주의 수락
산, 설악산, 금오산 등지를 방랑하다 47세 때 환속하였다. 그러나 아내가 죽자 인생의
무상을 느끼고 다시 승려가 되어 성종 24년 홍산(鴻山)의 무량사에서 향년 59세로 입
적하였다. 저서로 금오신어(金鰲新語) 등이 있다. 성담수는 본관이 창녕, 자는 미수
(眉叟), 호는 문두(文斗)인데 교리 희(熺)의 아들이다. 그는 세종 32년 진사에 올라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고 승문 교리에 이르렀으나 단종의 비극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렸다. 특히 세조가 즉위한 뒤 한 번도 한양 땅을 밟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으며
강호에서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 把竿終日越江邊 垂足滄浪因一眼 夢興白鷗飛海外
覺來身在夕陽天(종일토록 낚시대를 잡고서 강가에서 보내며 푸른 물결에 다리를 드리
우고 눈을 하나로 모으니 고단하구나, 어느덧 꿈속에서 백구나 더불어 바다 밖까지
훨훨 날았는데 깨어보니 석양의 하늘아래 몸이 그대로 있구나.) 이맹전(1392~1481)
은 본관이 벽진(碧珍)이고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이라 하였는데 대대로
성주(星州)에서 살았으며 병조판서 심지(審之)의 아들이다. 세종 원년 문과에 급제
하여 사간원, 정원, 소격서령 등을 지내고 외직으로 거창 현감을 지냈는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계유정난이 있자 벼슬을 내 놓고 초야에 묻혀 일생을 보냈다.
조여(1420~1489)는 본관이 함안,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인데 단종 원년
진사에 올라 덕망이 높았으나 단종이 그 자리에서 쫓겨나자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인
함안으로 돌아가 백이산 아래서 은거하며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 그의 집이 몹시
가난했으나 부모를 극진히 봉양했으며 김시습과 친했었다. 남효온(1454~1492)은
본관이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이었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그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하였고 점필제(佔畢齊), 김종직(金宗直) 문하
의 수재였다. 성종 12년 28세 때 소능(昭陵=단종의 어머니 현덕옹후의 능)의 복위를
상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고 사육신을 숭배
하여 ‘육신전’을 지었으며 스스로 세상을 울분하며 살았는데 39세로 일찍 죽었다.
이상이 생육신인데 숙종 때 영남의 선비들이 함안의 백이산 아래 사당을 짓고 서산
서원(西山書院)이라 했으며 여기에 김시습, 이맹전, 조여, 원호, 성담수, 남효온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생육신’이란 말이 생겨났던 것이다. 남효온 대신 권절
을 치기도 하는데 그는 본관이 안동이고 자는 단조(端燥), 호는 율정(栗亭)이다.
어렸을 때부터 용모가 괴위하고 완력이 뛰어났고 또한 만권 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세종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를 거쳐 관찰사를 지냈다. 교리로 있을 때
수양대군이 그 집을 찾아와서 은근히 가담할 것을 말했는데 그는 귀가 먹은 것처럼
동문서답을 하였다고 한다. 세조가 즉위하자 첨지중추(僉知中樞)로 불렀는데 응하지
않았다. 끝으로 생육신은 아니지만 특기할만한 인물이 있다. 좌의정 허주의 아들
허허(許詡)가 그 사람이다. 세종 때 벼슬길에 올라 20년 동안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아
덕망이 자못 높았다. 문종이 승하하자 황보인, 김종서 등과 고명을 받고 좌참찬에 올
랐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죽이자 여러 공신들이 축하연을 열
었는데 어찌 죄없는 중신이 죽었는데 술이나 마시고 즐길 수 있느냐고 그 축하연에
참석하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한다. 이때 허허에게 우찬성을 내렸으나 한사코 받지
않으니 거제도 귀양을 보내고 뒤에 약사발을 내려 죽였다. 세조 원년 성삼문 등 사육
신의 사건이 터지자 세조는 “허허가 있었으면 6 신이 아닌 7 신이 되었으리라”하고
술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