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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18. 10:59
長白山의 긔를 곳고 두만강의 말 싯기니
서근 뎌 선븨야 의리 아니 사나희냐
엇더타 凌煙閣 畵像을 우리 몬져 하리라
<해설>
백두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겼으니 저 쓸모없는 선비들아!
우리가 남아 대장부 아니고 무엇이냐, 능연각의 초상을 그려 거는 것도
우리가 먼저 하리라.
朔風은 나모 긋데 불고 明月은 눈 속에 찬듸
萬里邊城에 一長劍 집고 서서
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거시 업세라
~김종서(金宗瑞;1390~1453)
<해설>
차고 매운 북쪽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스치고 부는데 밝은 달은
눈에 덮인 산과 들을 비추어주어 한결 더 싸늘하게 만들어 준다.
서울에서 멀리멀리 떨어진 변성의 성벽에 올라 한 자루의 큰 칼을
짚고 서서 한바탕 휘파람을 길게 불고 목청껏 외쳐보니 감히 그 무엇도
가로 막지 못하는구나.
◈ 배경
사육신을 처형한 뒤 세조는 상왕(上王) 단종도 관계가 있었다 하여 강원도 영월로
군사 50명을 딸려 귀양 보냈다. 또 문종의 비 현덕왕후 권씨는 이미 돌아가 문종의
위패와 나란히 종묘에 모셔지고 있었으나 서인(庶人)으로 만듦과 동시에 위패를
폐기하라고 명했다. 한 패의 군졸들이 종묘로 달려갔는데 현덕왕후의 위패가 이들
군졸을 보더니 훽 돌아섰다고 한다. 군졸들은 너무나도 괴이한 일이라 벌벌 떨고
무서워서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단종을 논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켜 영월
로 보낸 세조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실시했다. 좌의정에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에 봉해진 권람(1416~1465)은 양촌 권근의 손자로서 자는 정경(政卿), 호는 소한
당(所閑堂)이다. 학자 가문에 캐어나 세종 때의 관찬(官撰) 사업인 경국대전(經國大
典),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을 신숙주, 최항(崔恒) 등과 더불어 참여했다. 한명회(14
15~1487)는 본관이 청주로서 자는 자준(子濬)이고 호는 구정(鷗亭)인데 이조판서,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정인지(1396~1478)는 본관이 하동(河東)으로 자는 백
수(伯腄)이고 호는 학이재(學易齋)인데 학자였다. 태종 14년 16세로 생원이 되었고
동 14년 문과 장원으로 급제 문명을 떨쳤다. 세종 5년에는 고려사를 편찬하였고
동 14년에는 대제학 정초(鄭招)와 더불어 관언기(觀天器) 제작을 명받아 북극 측정
기, 물시계 등을 제작한 바 있었다. 또 역법동이(曆法同異), 일월식(日月食), 오성사
암(五星四暗) 둥을 써서 상감께 올렸고 훈민정음 제정에도 공이 많았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영의정이 되자 그는 우의정이 되었고 수양이 즉위하자 벼슬이
영의정으로서 하동부원군에 봉해졌고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홍달손(1415~14
72)은 본관이 남양(南陽)으로 자는 가칙(可則)인데 병조참의에 남양부원군이 되었
다. 세조가 즉위하자 병조판서, 좌의정에 차례로 올랐다. 홍윤성(1425~1475)은 본
관이 회인(懷仁)으로 자는 수옹(守翁)인데 그는 세종 3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무용이 있어 사복시(司僕寺)로 직을 옮겼는데 세조정난에
인천부원군이 되었다. 이때 함경도 도절제사로 이징옥(李澄玉)이란 장군이 있었다.
본관이 양산(梁山)으로 약관 19세로 김종서의 추천을 받아 강계방어사가 되었으며
여진족을 토평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김종서가 내직으로 들어오자 이곳 국방을
맡는 도절제사가 되었던 것이다. 세조는 정권을 잡자 이징옥을 갈아 치울 것을 결
심하고 박호문(朴好門)을 도절제사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이징옥은 느닷없는 왕
명을 받자 어리둥절하였으나 중앙에서 정변(政變)이 일어났다는 것은 까맣게 모르
고 그대로 사무 인계를 해주었다. 그리고 장교 하나만을 대동하고 임지를 출발했는
데 한 이십리 쯤 오자 장교가 말했다. “장군! 아무래도 신임 도절제사의 태도가 이상
하지 않습니까?“ ”음 나도 그렇게 생각된다. 절재(김종서)대감께서 서울로 올라가실
때 이곳은 요지이므로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 곳이다. 무슨 일이 있다면 내가
편지로 알려주마 하셨는데 그 편지도 없으니.....? 이징옥은 말을 돌려 다시 달려가
박호문을 족쳤다. 그 결과 김종서가 이미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었으며 세조가 단종
을 몰아냈음을 비로소 알았다. 징옥은 곧 박호문을 찔러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칭하고 여진족과 손을 잡았는데 종성부사(鍾城府使)
정종(鄭種)의 기습을 받아 그의 세 아들과 함께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