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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지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18. 09:23
客散門扃하고 風徵月落할제
酒甕을 다시 열고 時句흣부리니
아마도 山人得意는 이뿐인가 하노라
~하위지(河緯地;?~1456)
<해설>
함께 마시던 손님도 돌아가고 문을 닫고 나니 바람도 있는 듯 없는 듯
약하고 달도 지어 캄캄할 때 어딘지 아쉬운 느낌이 들어 술독을 다시
열어놓고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싯구를 읊어본다. 어쩌면 속세를 떠나
은거하고 있는 나의 가장 즐거운 일은 이렇게 술 마시며 싯구를 읊는
것이 아닐른지 모른다.
◈ 배경
단종 3년(1455) 6월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를 하고 물러났는데 이는 순전히 음모
와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삼문이 예방승지로서 국새를 맡고 있는 소임이 었는데 그
국새를 안고서 통곡했으며 이때부터 당종의 복위를 위한 동지 획득에 나섰다. 세조
2년(1456)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의 환영잔치가 있게 되었는데 그때 세조를
비롯하여 한명회, 정인지, 권람 등을 해치우기로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잔치가
있게 된 날, 세조는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으니 운검(雲劍)은 그만두라고 지시했다.
운검은 임금의 옥좌 양 옆에 큰 칼을 들고 왕을 지키는 사람으로 당시 도총관이었던
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맡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조는 무심코 지시한
일이었으나 성삼문 등은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이었다. 유응부는 무인답게 “우물거리
면 대사를 그릇친다. 운검의 건이 실패했지만 세조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들이치면
된다.“하고 그대로 거사를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삼문은 이를 말리며 “다음 기회
를 기다립시다.”하고 계획을 미루었다. 이때 동지의 하나로서 가담하고 있었던 김질
(金鑕;1421~1477)이 겁을 먹고서 장인인 정창손(鄭昌孫;1402~1487)을 찾아가 의논
했다. 김질은 본관이 안동이고 자를 가안(可安), 호를 쌍곡(雙谷)이라 하였다. 세종
32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수찬이 되고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문종의 은의
를 생각하고 모의에 참가했던 것인데 아무래도 일이 성사될 것 같지 않아 좌찬성인 정
창손을 찾아갔던 것이다. 정창손은 본관이 동래이고 자를 효중(孝中)이라 했는데 세종
8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제학으로 있으며 고려사, 세종실록, 치평요람(治平要
覽) 등을 편찬했던 관계로 정인지와도 친했다. 따라서 사위 김질이 말하는 엄청난 사
실을 알자 깜짝 놀라며 즉시 세조에게 이것을 고변(告變)했던 것이다. 정창손은 이 공
으로 봉원부원군이 되었고 김질도 또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에 상락군(上洛君)에
올랐다. 이리해 명나라 사신이 돌아간 다음 날 사육신의 친국(親鞠)이 시작 되었다.
맨 먼저 끌려나온 것은 성삼문이었다. 세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했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을 뿐입니다. 천하에
누가 그 임금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제 마음은 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
다. 어찌 배반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나으리(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께서는 평소에 성왕(成王)을 보필한 주공(周公)을 입에 올리곤 했었는데 주공이 이런
짓을 했습니까? 제가 이 일을 꾸민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 없고, 땅에 두 임금
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왕위를 받을 때 막지 않고 나에게 붙었다가
이제야 배반했단 말이냐?“ ”대세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막지 못하니 물
러나서 죽는 길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쓸데없이 죽는 것은 소용이 없는
노릇, 참고 오늘에 이른 것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흥,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서 배반하는자는 반역자다. 명색은 상왕(단종)을 다시 모신
다면서 진실은 자기 잇속을 차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
가 어찌 저를 신하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나으리의 녹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믿지 못하겠거든 저의 집을 몰수해서 조사해 보십시오. 광에 고스란히 쌓여
있을 것입니다.“ 이 말에 세조는 크게 노하여 무사들로 하여금 불에 시뻘겋게 단
쇠로 삼문의 다리를 찔러 꿰뚫고 팔을 잘라버렸다. 그는 얼굴빛도 변치 않고 조용히
말했다. “나으리의 형벌은 참혹합니다 그려“ 이때 신숙주가 세조 옆에 있음을 보고
삼문은 힘을 쥐어짜 꾸짖었다. “너와 내가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대왕께서 세손을
간곡히 당부하시지 않았느냐! 그렇건만 네가 이렇게까지 못된 줄은 몰랐다“ 신숙
주는 비실비실 피해버렸다. 이어 제학 강희안(姜希顔;1419~1464)이 끌려나왔다.
강희안, 강희맹(姜希孟) 형제는 모두 당대의 명신이었다. 강희안은 본관이 진주이고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齋), 세종 2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 학사로 삼문,
정인지 등과 훈민정음을 편수한 사이다. 그는 시문에 있어 당나라의 유자후(柳子厚)와
같다 했고 글씨는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와 같고 그림은 송나라의 곽희(郭熙)를 겸
했다는 평을 들었다. 강희맹이 잡혀와 국문을 받을 때 “나는 도무지 모르는 일입니다”
하고 부인했다. 세조가 성삼문에게 “사실이냐? 공모한 일이 없느냐?”하고 묻자 삼문
은 “그는 모르는 일입니다. 나으리는 이 나라의 어진 신하를 모두 죽이실 작정이오“
하고 말했으므로 강희안은 무사할 수가 있었다. 박팽년이 끌려나왔다. 팽년은 세종 16
년 문과에 급제하고 동 29년 중시에 올라 집현전 학사를 거쳐 중추원 부사에 올랐다.
단종이 양위하고 수강궁으로 물러가자 경희루 연못에 몸을 던지려고 했는데 삼문 등
이 만류하는 바람에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관찰사로 내려갔다가 곧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으로 있었다. 세조는 그를 보자 “너는 어째서 배반했느냐? 너는 내 신하로
내 녹을 받아먹지 않았느냐?“하고 꾸짖었는데 박팽년은 ”나으리, 나는 나으리의 신하
가 된 적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무엇이?“ 세조는 더욱 불길같이 뛰며 갖은 혹
독한 고문을 가했으나 조금도 굴치않았다. 나중에 알은 일이지만 박팽년이 충청관찰
사로 있을 때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에 ‘臣’자가 모두 ‘巨‘자로 씌어 있었다고 한다.
그 다음은 이개였다. 이개는 목은 이색의 증손자로서 세종 16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어 중시에 오른 수재다. 직제학(直提學)으로 체포, 국문을 받았는데 국문을 이기지
못하고 절명했다. 이어서 유응부가 끌려나왔다. 모의에 참가했던 유일한 무인으로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신지(信之)였고 무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도체찰사를 지냈
다. 세조는 그에게 “너는 무슨 짓을 하려 했었느냐?“하고 묻자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자네를 없애고 옛 임금을 복위하려고 했더니 간사한 무리의 고발로 붙잡혔다. 여러
말 말고 자네는 어서 나를 죽여주게“ 하자 세조는 대노하여 갖은 악형으로 자세한 것
을 캐물었으나 다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득 성삼문을 돌아보더니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옛 부터 일러오기를 서생과는 무슨 일이고 도모할 수 없다 하였는데, 이제
보니 과연 그러하도다. 그대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오늘 이 꼴을 당하니 정말이지
분하구나, 이제 누구를 원망하리오.“ 그러고서 세조에게 “더 묻고 싶거든 서생들에게
물어보게”하고 하였다. 세조는 화가 극도에 달하여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배꼽을
지지게 하자 유응부는 “쇠꼬챙이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갖고 오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위지도 끌려와 국문을 받았는데, 그는 본관이 진주이고 자는 중장(仲章)이요
호는 단계(丹溪)였다. 성격이 차분하고 좀처럼 말이 없었으며 주구에게나 공손하고
예의 발랐는데, 세종 20년 문과에 장원하고 세조가 즉위하자 예조참판을 시켰다.
그러나 그 녹을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으며 세조도 그가 일당임을 알고서 깜짝
놀랐으나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끝으로 유성원(柳誠源)은 본관이 문화(文化)
이고 자는 태초(太初)이며 세종 26년 등과한 뒤 집현전 학사로 선임되어 그 명망이
높았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였을 때, 수양대군은 이번 정난의 공을 주공에
비유하여 송덕문을 지으라고 집현전 학사에게 명했다. 다른 학사들이 모두 피하고
달아났는데 불운하게도 유성원이 홀로 있다가 붙잡혀 협박을 받고서 이 글을 기초
하였다. 유성원은 그것을 항상 꺼림칙하게 생각했는데 일이 발각되자, 사당에 들어가
스스로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