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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응부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18. 09:02

    간밤에 부던 바람 눈서리 티닷 말가

    落落長松 다 기우러 디닷 말가

    하믈며 못다 핀 고지야 닐러 무삼하리오

                               ~유응부(兪應孚;?~1456)~

    <해설>

    간밤에 불던 몹쓸 바람에 눈과 서리까지 몰아쳤단 말인가?

    곧고 푸르던 낙낙장송도 그리하여 다 쓰러졌단 말인가?

    그러할진대 다 피지도 못했던 꽃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 배경

    하룻밤 사이에 황보인, 김종서 등이 역적으로 그 집안이 결단나고, 그 목이 저자에

    렸던 것이다. 이 시조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국가의 낙낙장송 같은 절의

    는 인사들이 그야말로 하룻밤에 눈바람처럼 몰아닥친 광풍 앞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못다 핀 꽃이란 누구를 가르키는가? 노 대신들 아닌 그들의 자제, 어린 손자들을 말하

    는 것이리라. 당시 역적의 집안이면 남자는 젖먹이라도 목숨을 잃었고 여자는 관비로

    전락되는 것이었다. 수양대군의 이 혁명을 계유정난(癸酉靖 難)이라 부르는데, 수양

     

    대군이 스스로 영의정이 되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에, 한확(韓確)을 우의정에

    명하는 한편 집현전 학사를 시켜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을 김동서의 당이라 하여 강화로 귀양보냈다.

     

    안평대군은 이름이 용(瑢)인데 자는 정지(靖之), 호는 매죽당(梅竹堂),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시, 글씨, 그림이 다 뛰어났고 특히 글씨는 당시에 있어서 ‘천하제일’

    이라고 일컬어 졌다. 수양대군과는 달리 학문을 좋아했으며 서강에 있는 그의 별장

     

    담담정(淡淡亭)에는 만 권의 장서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체격이 우람하고 덕망이

    있어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수양은 이것을 위험시하고 강화로 귀양 보냈다가 곧 죽였

    으니 향년 36세였다. 이제 사육신을 알아보면 성삼문은 본관이 창녕, 자를 근보(謹甫)

     

    라 했고 호는 매죽헌(梅竹軒)이었다. 그의 고조부 성여완(1309~1397)은 호가 이헌

    (怡軒)인데 고려 우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창녕부원군이었다. 고려가 멸망하자

    포천의 왕방산(王方山)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89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뒷 사람들이

     

    그 충성심을 포은에 비교하고 그 절의를 목은과 야은하고 같다고 논평했다. 나라가

    멸망하게 되면 충신이 나오는 법이다. 고려를 위해 ‘절의를 지킨 충신들 가운데 두문

    (杜門) 72현이라는 분들이 있다. 개성 근처인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두문

     

    동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 이성계를 섬기는 것을 거부한 교려의 충신 신규, 맹호

    성 등 72명이 숨어 살았던 것이다. 그들이 바깥 세계에 일체 나가지 않으므로 ‘두문

    불출’이라는 말이 생겼다. 성삼문의 집은 이와 같은 충의의 핏줄을 이어받고 있었다.

     

    성석린(成石麟;1348~1423)은 창녕부원군 여완의 아들로서 자는 자수(子修), 호는

    독곡(獨谷)인데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시문이 뛰어났다. 이씨조선이 들어

    서자 이색의 당이라 하여 한 때 고향에 내려가 있었는데 태조의 부름을 받아 영의정

     

    까지 지냈다. 석린의 손자가 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이었다. 성삼문이 태어날 때

    홍주(洪州=지금의 홍성) 외가집에서 났었는데 막 태어나려고 할 때 “낳았느냐?”하고

    세 번 공중에서 묻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삼문이라 이름을 지었다. 세종 20년 생원

     

    으로 문과에 급제, 세종 29년에 중시에 장원을 하여 승지(承旨)가 되고 왕을 항상

    가까이서 모셨다. 이보다 앞서 세종 25년 훈민정음이 창제될 때 그는 집현전 학사

    로서 음운 연구를 위해 명나라를 세 번이나 왕복했고 신숙주, 박팽년, 이개 등과 공이

     

    컸다. 단종 원년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집현전 학사에게도 정난공신

    호칭을 내려 주었는데, 동료들이 그 축하연을 돌아가면서 베풀고 한 턱 냈다.

    그러나 삼문은 이걸 수치로 여기고 잔치를 베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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