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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개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17. 20:24

    방 안희 혓는 쵸불 눌과 리별하엿관대

    것흐로 눈물 타고 속 타는 줄 므르논다

    우리도 千里에 님 리별하고 속 타는듯 하여라.

                            ~이개(李塏;1417~1456)~

    <해설>

    방안 창문의 가까이 켜놓은 촟불아 너는 누구하고 서로 이별하였기에

    그처럼 겉으로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그 속이 타는 줄도 모르느냐?

    우리도 천리 먼 곳에 임을 떠나보내고 너처럼 마음속이 타서 눈물

    흘리고 있다.


    ◈ 배경

    세종대왕은 슬하에 18남 4녀를 두었다. 왕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

    의 따님 소현 왕후였다. 왕후의 몸에서 난 왕자를 대군(大君)이라 하고 그 밖의 후궁

    소생을 군(君)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왕후 소생인 따님을 공주(公主)라 하고 후궁

     

    소생을 옹주(翁主)라 한다. 세종이 승하하자 제 5대 문종(文宗)이 왕위에 올랐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로서 세종 3년에 세자로 책봉되고 세종 27년 왕께서 병환이 있자

    정무를 밭아 처리했다. 그리하여 세종 32년 2월(음력) 부왕 영구 앞에서 즉위했다.

     

    문종은 특히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왕이 병석에 있게 되자 그 옆을 한시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거의 침식을 잊다시피 했으며 너무나 애통해 했으므로 건강을 해쳤다.

    왕비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권전(權專)의 따님, 현덕왕후로서 1 남 2 녀를 두었

     

    다. 문종(1414~1452)이 재위 2년 겨우 39세고 승하하자 비극의 제 2막이 막을 올렸

    던 것이다. 문종의 유일한 아드님으로서 단종이 부왕의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

    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이 아직 살아계실 때 즉 세종 30년 특별히 왕세손을 책봉하고

     

    성삼문과 신숙주 등 젊은 신하들에게 이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던 것이다. 단종이 즉위

    하자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보좌를 하게 되었는데 이들

    은 이미 늙은 신하들이었고 세종의 왕자로써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왕권에 대한

     

    야망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리라. 특히 수양대군(1417~1468)은 세종의 둘째 아드님

    으로 어려서부터 병서를 좋아하고 무예를 즐겼으며 그의 집에 기르는 사병(私兵)이

    있었다. 전부터 권람(權擥)가 가까이 지내고 있었는데 권랍을 통하여 한명회(韓明澮)

     

    를 알게 되었고 다시 홍달손(洪達孫), 양정(楊汀) 등 30여 명의 장사를 집에 기르고 있

    었다.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기회는 다시 없이 좋았지만, 두려운 것은 늙었다하

    더라고 왕년의 명장 김종서였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권람과 한명회 등과 밀의를 거듭

     

    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영의정 황보인은 생년이 분명치 않으나 본관은 영천(永

    川)이고 자를 사겸(四兼), 호를 지재(芝齋)라 하는데 절도사 림(琳)의 아들이었다.

    세종 때 북도 채찰사로서 김종서와 더불어 육진(六鎭)개척에 공이 컸고 문종 때 영의

     

    정으로서 그 고명(顧命)을 받았던 것이다. 또 김종서(1405~1453)는 본관이 순천(順

    天)으로서 자를 국경(國卿)이라 하고 호를 절재(節齋)라 하였는데 도총제(都摠制)

    수(錘)의 아들이었다. 태종 5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세종 16년 함경도 도절제사가

     

    되어 여진족을 물리치고 두만강 이남의 6진을 개척하였다. 비록 작았으나 지략이

    뛰어나고 일을 과감히 처리했으므로 모두들 호랑이라고 두려워했다. 6진 개척에서

    돌아오자 병조판서가 되었고 이어서 문종 때 우의정이 되었으며 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이 되었던 것이다. 단종이 5월에 즉위했던 해 10원, 어린 왕은 행궁에서 출가

    한 누님과 만나 회포를 풀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이때다 싶어 몸소 말을 타고 홍운성

    (洪允成), 홍달손, 양정 등을 데리고 김종서 집으로 달려갔다. 이때 김종서는 어린

     

    손자와 한가롭게 즐기고 있었는데 밖에 나갔다 돌아온 아들 승규(承珪)가 “밖에 수양

    대군이 오셨습니다. 불량배인 듯 한 자 몇 사람을 거느리고 있어 아무래도 수상하오

    니 만나지 않으심이 어떻습니까?“하고 핑계를 대고서 그냥 돌려보낼 것을 권햇다.

     

    김종서는”이 밤중에 나으리께서 무슨 일로 오셨을까? 내가 나가서 직접 맞이해야

    예가 된다.“하고 의복을 단정히 갖추어 입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종서가 읍

    하며 “나으리께서 어쩐 일로......“ 물었을 때 홍달손 등이 불문곡직 달겨들어 칼과

     

    철환 등으로 종서를 쳐 죽였다. 이리하여 수양대군은 그날 밤으로 “김종서가 모반

    하여 죽였는데 일이 급하므로 사전에 임금께 아뢸 여유가 없었다.“고 상주하였다.

    어린 왕 단종은 그저 벌벌 떨 뿐이었다. 이어 왕명으로 신하들을 긴급소집했는데,

     

    한명회가 미리 작성한 블랙 리스트(생살부)에 따라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趙克寬), 찬성 이양(李穰) 등 반대파 중신을 궐문 안에서 차례로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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