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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17. 20:16
가마귀 눈비 마자 희는 듯 검노매라
夜光 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한 一片 丹心이야 고틸 줄이 이시랴
~박팽년(朴彭年)~
<해설>
까마귀가 눈비를 맞아 잠시 희어지는 듯 보이지만 그래도 역시
검을 뿐이다. 그러나 언제고 빛나는 보석은 밤이라고 해서 그 빛을
잃는 게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님(단종)에게 바친 이 몸의 충성
이야말로 아무리 한들 변할 수가 있겠는가.
◈ 배경
세종대왕의 업적 가운데 집현전(集賢殿)이란 것이 있음은 모두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이름의 관청은 고려 때도 있었던 것인데 세종이 그 내용을 혁신하고 널리 이용했다
는데 그 특징이 있다. 세종 2년 전부터 있었던 수문전과 보문각을 합치고 젊고 재주
있는 선비를 뽑아 학사로 임명한 것이다. 이 집현전의 학사는 따로 관직을 갖고 있지
않은, 말하자면 엘리트들로 구성된 학자들이었다. 그래서 자유롭게 서로 토론도 하고
보다 나은 학문을 위해 연구도 했다. 왕께서도 가끔 집현전에 나타나 이들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격의 없는 말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이 중에서 세종은 특히 신숙주(申叔
舟;1414~1475)와 성삼문을 사랑하였다. 숙주와 삼문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신숙주
는 자를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閒齋) 또는 희현당(希賢堂)이라 하였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 생원이 되었고 이듬해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집현전의 부수
찬(副修撰)이 되었다. 이때 숙주가 가장 기뻐한 것은 궁중의 장서각에 들어가 마음
대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동료들의 대신으로 숙직까지 하면
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공부하기 일쑤였다. 어느 겨울밤이었다. 세종이
문득 밖에 눈이 오는 것을 보고 집현전의 마루방에서 숙직하고 있을 학사들이 얼마나
추울까 하고 생각했다.(궁중은 물론 일반에도 온돌이 보급 돼 있지 않았다) “누군가
집현전에 가보고 오 너라, 학사들이 추워서 떨고 있지나 않는지 모르겠다.“ 내시 하나
가 갔다 와서 아뢰었다. “신죽주가 혼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추워 보이지 않
더냐?” “예 매우 추운지 손을 호호 불고 책장을 넘기고 있었사옵니다.“ 왕은 그 보고
에 과인이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며 책을 계속 읽었다고 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밤이 꽤나 깊었는지 눈은 전보다 훨씬 많이 쌓였고 촟 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여봐라, 집현전에 가보고 오너라.” 왕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내시가 다시 나갔다, 오더니 “아직도 신숙주가 책을 읽고 있사옵니다.”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세종은 크게 놀랐다. 그래서 왕도 졸음을 쫓아가면서 책을 읽었다. 첫
닭이 어딘가 멀리서 울었다. 밤을 새면 아는 일이지만 새벽 녘, 그것도 해가 떠오를
무렵 제일 졸렵다. 왕도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지며 졸음이 왔다. 그래서 세종은 내시
를 시켜 다시 가보라고 했다. 내시는 돌아오자 “가보았더니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오오, 하루 종일 편히 지내는 과인도 이렇게 졸음이 오는데 숙주인들 오죽이나 고달
프겠는가, 이 옷을 벗어 줄테니 가서 잠이 깨지 않도록 살며시 덮어주고 오너라.“ 하고
왕은 어의를 내시에게 벗어주었다. 숙주가 나중에 잠이 깨고 어의를 덮고서 잔 것을
알자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세종 24년 훈련주부(訓鍊主簿)가 되었다. 이때 일본
에 통신사를 보내게 되어 글 잘하는 선비로 서장관을 삼기로 하였는데 숙주가 뽑혔
다. 숙주는 이때 앓다가 일어난 직후라 일가친척들이 먼 길을 가는 것을 염려하며
모두들 말렸으나 “신하된 몸으로 어렵고 편한 것을 가릴 수 없다”하고 나섰다. 일본
에 이르자 그의 재주 있음을 알고서 시를 써달라는 사람이 많았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줄줄 시르 써주자 모두들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했다. 이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가장 공이 컸는데, 마침 죄를 짓고 요도에 귀양 와 있는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 요동을 열세번이나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했다.
세종 29년 중시(重試)에 4등으로 급제하였고 (이때 성삼문이 1등을 하였다.) 집현전
응고(應敎)가 되었다. 세종께서 이 무렵 자주 병환이 생겼는데 어린 손자를 손수 안아
주시며 “이 아이가 장차 이 나라에 대통을 잇게 되면 경들이 잘 보필해 주시오.“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 손자가 바고 뒷날의 단종(端宗)인 것이다. 신숙주는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 서장관으로서 따라 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