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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17. 20:07
江湖에 봄이 드이 이 몸이 일이 하다
나는 그물 깁고 아회는 밧출 가니
뒷뫼헤 엄나라는 약을 언제 캐랴 하느니
<해설>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는 봄철이 닥치고 보니 나도 할 일이 많구나
나는 고기잡이를 하고자 꿰진 그물을 깁고 아이는 밭을 가는 등
저마도 제 할 일이 바쁘다, 뒷산에 있는 약초는 언제 캘 것인가.
대쵸볼 불근 골에 밤은 어이 뜻드르며
벼 벤 그르헤 게는 어이 내리는고
술 닉쟈 체 쟝사 도라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황희(黃喜;1363~1452)~
<해설>
대추가 붉으레한 골짜기에 밤은 또 아람벌어 떨어지며, 벼 벤 그루터기에
게는 어찌 나다니는가, 대추와 밤을 줍고 게를 잡으니 술안주 감이 생긴
셈인데, 술이 익자 체 장수까지 지나가니 그 체를 사서 새 술을 걸러 먹지
않고 어이 하겠는가.
◈ 배경
이직(1362~1431)은 본관이 성주(星州), 자를 우정(虞廷)이라 하고 호를 형재(亨齋)
라 했으며 유명한 이조년의 중손자이다. 고려 우왕 3년 등과하여 이씨조선 개국에
참여했으며 그 공에 의해 성산부원군이 되었다. 정종 때에는 서북면 도순 문찰리사
(都巡問察理使)로서 왜구의 배 6척을 격파하여 공을 세웠고 태종조에선 판서로 있다
가 귀양을 갔던 것이다. 이윽고 세종 13년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경문(景文)
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황희는 자를 구부(懼夫), 호를 방촌(庬村)이라 하는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아버지는 강능부사 군서(君瑞)였고 고려 우왕 때 등과하여 성균 학관
으로 있었는데 이씨 조선이 되자 세자 우정자(右正字)를 지냈다. 세종이 그를 불러
다시 쓰자 처음에는 관찰사, 대사헌 등을 거치고 이직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그리하여 영의정으로 24년이나 재임하였는데 세종조의 황금시대는 성군아래
이와 같은 명재상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세종대왕께서 중년 이후 제도를 쇄신 개혁
한 일이 있었는데, 황희는 조종(祖宗)의 구법을 가볍게 변경시키는 건 안 된다고 했으
며 의옥(疑獄)이 있을 때에는 관용을 베풀 것을 주장했다. 나이 늙어 사임한 뒤에도
국가의 대사가 있을 때마다 원로로서 반드시 왕의 부름을 받았고 문종 2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벼슬을 그만 두고서 지냈 던 곳은 파주 임진강변에 있었는데 반구정(伴
鷗亭)이라 했으며 그의 성격은 아들 이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치신(致身), 보신
(保身) 수신(守身)이라 했던 것이다. 장차 황치신(1397~1484)은 자를 맹충(孟忠)
이라 했는데 태종께서 그이 재주를 아끼시고 특히 동(董)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했다.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까지 이르렀는데 아들 아홉명 가운데 다섯 아들이
등과 했으므로 우의정을 추증 하였다. 또 황수신(1407~1467)은 자를 계효(季孝)라
하고 호는 나부(懦夫)라고 했다. 즉 스스로 게으르고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자계
(自戒)했던 것이다. 세종 5년 사마(司馬)가 되고 차츰 벼슬이 올라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이때 장안에 민심을 현혹시키는 무당들이 많이 있자 이들을 몰아냈다.
그 뒤 세족 즉위하자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마침내 영의정까지 올랐는데 그 해에
향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