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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삼문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16. 22:06

    수양산 바라보며 夷齊를 恨 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採薇도 하는 것가

    아무리 푸새엣 거신들 긔 뉘 따해 낫더니


    <해설>

    수양산 바라보며 백이숙제를 한탄하노라 차라리 굶주려 죽을

    지언정 고사리라도 왜 캐어 먹었단 말인가, 아무리 대수롭지

    않은 풀일망정 그것이 뉘 땅에  난 것인데 먹었단 말인고?


    이 몸의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蓬萊山 第一峯의 落落長松 되었다가

    白雪이 滿乾坤할제 獨也靑靑하리라.

                       ~성삼문(成三問;1418~1456)

    <해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우리나라 제일의 명산인 봉래산

    (금강산) 제일 높은 봉우리에 우뚝 솟은 큰 소나무가 되어 흰 눈이

    하늘과 땅에 가득 날리는 겨울철에 홀로 푸르고 푸른빛을 간직하리라.


    ◈ 배경

    태종은 1418년 세자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세종대왕께서 22세로 왕위에 올랐다.

    세종대왕의 치적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것도 없으리라. 양녕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하

    게 한 류정현(柳廷顯)은 문화(文化) 류씨로서 자를 여명(汝明)이라 하였고 호는 월정

     

    (月亭)이었다. 본디 정몽주의 당으로서 유배되었으나 태종 때 등용되어 우의정을

    거치고 영의증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허조(許裯)와 더불어 ‘중외구임지법(中外久任

    之法)’이란 것을 만들어 태종의 윤허를 얻었는데, 세종조에서도 계속 시행하였다.

     

    중외구임지법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한 가지 법을 세웠다면 그것을 함부로 고치지

    않고 오래도록 계속한다는 법이었다. 이 법이 시행됨으로써 이씨조선의 기초가 확고

    히 다져졌고 국민이 안심하고서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허조(許裯;1369~1439)는

     

    하양(河陽) 허씨로서 자는 중통(仲通)이고 호는 경암(敬菴)이었다. 양촌 권근의 문하

    에서 수학했으며 태종 때 세자 양녕을 수행하여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를 거쳐 좌의정까지 올랐다. 이때는 이미 늙은 몸이었으므로 궤장(几杖), 즉

     

    임금님 앞에서 지팡이를 짚고 걸상에 앉을 수 있는 노재상이었다. 허주는 몹시 신중

    한 성격으로 관리 하나를 임명할 때 그 인물을 엄선하고 다시 토론을 거쳐 중의가

    일치 되었을 때에 비로소 임명했다고 한다. 또 당시 일부에서 관기(官妓) 폐지론이

     

    대두 되었는데 이것에 반대하고 만일 폐지하면 그 폐단이 양민에 미친다고 하였다.

    세종 2년 대왕은 상왕(上王)인 태종을 모시고 한강으로 뱃놀이를 나갔다. 이 뱃놀이

    하는 곳에 선전관이 급히 달려왔다. 왜구가 연평섬을 침략해 노략질을 한다는 보고

     

    였다. 젊은 세종은 침착히 뱃놀이를 마치고 귀궐하자 심야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대신들이 깜짝 올랄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왜구의 뿌리를 뽑아야 하오, 그러자면

    군사를 일으켜 그 근거지인 대마도를 쳐야만 하오.“ 대신들은 소스라쳐 놀라고

     

    불가함을 주장했으나 젊은 상감의 결의는 굳었다. 이리하여 1 만 7 천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종무(李從茂)가 삼도도체찰사로 대마도를 정벌했던 것이다. 이종무(13

    69~1425)는 장수(長水) 이씨로 어려서부터 강원도 연안지방에 출몰하던 왜적을 토벌

     

    하는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었다. 이때 이미 노장이었으나 적선 2 백 여척을 격파하고

    2 천 여 호의 집을 불사른 뒤 대마도 성주의 항복을 받고서 개선하였다. 세종 4년 

    상왕이던 태종이 승하했다. 그 장례가 끝나자 대왕은 뜻밖인 하명을 내렸다. “지난날

     

    과인의 세자 책봉에 반대하여 죄를 얻고 귀양을 간 황희(黃喜)와 이직(李稷)의 귀양

    을 풀도록 하오“ 황희와 이직은 말하자면 양녕대군의 당으로서 그 세자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고 귀양을 갔던 것이다. 세종은 부왕이 돌아간 시점

    에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중용(重用)하기로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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