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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석린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15. 21:30

    言忠信 行篤敬하고 酒色을 삼가면

    내 몸의 병이 업고 남이 니르리니

    行하고 餘力이 잇거든 學文조차 하리라.

                                           ~성석린~

    <해설>

    하는 말이 충성스럽고 믿음성이 있으며 행실이 돈독하고

    술과 여자를 삼가 지나치지 않는다면, 우선 내 몸에 병이

    들지 않아 좋고 또한 남도 나의 말과 행동을 일컫게 될 것이다.

    그런 언행을 다하고 또 힘이 남으면 글도 배우리라.


    ◈ 배경

    박포(朴苞)는 무인으로서 태조 7년 제 1차 왕자의 난이 있을 때 지중추원사(知中樞院

    事)로서 방원을 도운 공이 많았는데 공에 비해 논공행상이 적음을 불만으로 여겼다.

    그래서 태조의 넷째 아들 방간의 사람됨이 뛰어남을 알고 그의 당이 되었다. 그리고

     

    방원을 칠 계획을 짰는데 오히려 방원군에 패하고 말았다. 이 결과 방간은 황해도

    토산(兎山)으로 귀양 보내져 후에 피살되었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정종 2년(1400)의

    일이다. 정종은 이 난이 있자 항상 불안해했는데 왕비가 “저는 시동생의 눈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어요.”하고 말했으므로 마침내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결심했다.

    이리하여 정종 2년 11월, 하륜(河崙), 박은(朴訔) 등이 방원을 추대했는데 제 3대

    태종(太宗)이다.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태조의 노여움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종이 문안사(問安使)를 보내면 목을 베어버렸다. 태종은 문안사를 보내

    긴 해야겠는데 ‘함흥차사’라 하여 가서는 돌아오지를 못하기 때문에 아무도 원하는

    이가 없었다. 이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있던 박순(朴淳)이 자원하여 가기를

     

    청했다. 박순은 사자의 수레를 타지 않고 망아지가 딸린 어미말을 타고 함흥에 이르

    렀는데 행재소(行在所)가 보이자 그 곳 길가에 망아지를 붙들어 매고 어미말을 타고

    서 행재소 문으로 들어갔다. “뭣이, 문안사가 왔다고?“ 태조는 장검을 거머잡고 마루

     

    로 뛰어 나왔는데 보니까 자기도 잘 아는 늙은 신하 박순 아닌가, 그때 어미 말과 망아

    지는 행재소의 담을 사이에 두고 구슬피 울었다. 태조는 문안을 드리는 박순에게 “저

    말이 왜 우느냐?”하고 물었다. 박순은 읍하며 “들어오는데 망아지가 방해라서 밖에

     

    떼어 놓았더니 저렇게 슬피 웁니다. 한낱 미물이지만 모자의 정이 지긋ㅎ여 그런 모양

    입니다.“고 대답했다. 태조는 묵묵부답이었으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게 있었다.

    (나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인가, 아무리 자식이 밉다 하여도 서로 부자의 정마저 잊고

     

    있다니.) 이리하여 박순은 행재소에서 묵게 되었는데 하루는 태조와 바둑을 두었다.

    이때 천정에서 어미 쥐가 한 마리 떨어졌는데 입에 새끼를 물고 있었으며 죽을 때까지

    놓지를 않았다. 이것을 보고 있던 박순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바둑판을 밀어놓고

     

    드려 울며 간하였다. “미물들도 저렇거늘 전하께서는 어찌 부자 분 사이에 서로

    어져 살 수 있습니까?“ 이 말을 들은 태조는 마침내 서울로 돌아 갈 것을 약속했다.

    박순은 기뻐하고 태조께 하직하고 행재소를 출발했다. 박순이 떠나자 태조를 모시고

     

    있던 신하들이 “다른 문안사는 모두 죽였는데 왜 박순만은 살려보내십니까 그러면

    공평하지가 못합니다.“하고 죽이기를 말하자 태조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 생각하고

    여검(御劍)을 내려주며 “만약 박순이 용흥강을 건넜다면 그냥 돌아오너라, 그리고

     

    만일 강을 건너지 못했다면 베어라.“하고 명했다. 태조의 생각으로선 박순이 용흥강

    을 무사히 건넜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순은 도중에서 배탈이나 지체를

    하였고, 태조의 명을 받은 자객들이 달려왔을 때에는 막 나룻배에 올라 있었다. 자객

     

    들은 말없이 어검을 휘둘러 박순의 허리를 베었고, 박순은 “몸 반쪽은 배위에 있는데

    몸 반쪽은 강에 떨어지는구나.(半在江上 半在船)“하는 시를 남기고 절명했다. 태조는

    이 보고를 받고 “박순은 나이 좋은 친구였는데 그를 죽였구나”하고 슬피 통곡했다고

     

    한다. 그 뒤 태조는 마침내 행재소를 떠나 한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태종은 그 준비

    로 조준을 시켜 양주에 별장을 이미 지어놓고 있었다. 태종은 이 양주별장까지 나가

    부왕을 맞이했는데, 태조는 태종을 보자 비명에 죽은 방번, 방석, 방간 등의 얼굴이 떠

     

    올랐다. 그리하여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태조는 칼을 뽑아 태종을 베려고 했다. “아,

    아버님 고정 하십시오” 태종은 태조의 칼날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그에게 다행이

    었던 것은 조준이 지은 이 별궁이 어쩐 까닭인지 기둥이 수 십 개 대청마루에 임립

     

    (林立)해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조준이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아름드리 기둥을 수 십 개 세웠던 것이었다. 태조는 마침내 흥분이 가라앉자 칼을

    버리고 “천운(天運)이다!” 하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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