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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준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15. 20:21

    술을 醉케 먹고 오다가 空山에 지니

    뉘 날 매오리 天地卽衾枕이로다

    狂風이 細雨를 모라 잠든 나를 깨와다

                            ~조준~

    <해설>

    술을 취하게 마시고 돌아오다가 아무도 없는 산 속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누가 잠든 나를 감히 깨우겠는가, 하늘이 이불이고 땅이 베개로구나.

    그러난 사나운 바람이 가는 비를 몰아다가 나를 깨운다.


    ◈ 배경

    이성계는 1392년 7월, 새 왕조의 태조로 즉위했다. 이 의전을 맡은 사람이 유명한

    무학대사(無學大師)이다. 무학스님은 영남 삼기(三岐) 사람으로 속성은 박씨였다.

    18세 때 출가하여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계명(戒名)을 받고 진천(鎭川)의 길상사

     

    (吉詳寺), 묘향산의 금강굴 등지에서 수도했다. 그러다가 20세 경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인도의 승려인 지공(指空)을 만났으며 고려의 명승 나옹(懶翁)과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나옹의 의발(衣鉢)을 계승했고 나옹이 왕사(王師)로

     

    돌아가자 무학을 왕사로 추천했으나 한사코 사양했다. 설봉산(雪峰山) 토굴 속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이씨조선이 세워지자 태조의 청으로 왕사가 되고 양주(楊州)에

    회암사(檜巖寺)의 주지가 되었다. 태조 원년 10월, 왕사의 식을 올리는 날 무학은

     

    태조에게 아뢰어 정치범의 특사를 청하였다. 태조가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죄수를

    특사했으며, 또 한양 천도의 제의를 하여 이를 결정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다.

    무학대사가 한양, 지금의 서울 답사를 나섰을 때의 일이다. 한양은 본디 고려 때

     

    남경(南京)이라 불렀으며 산이 험하고 앞에 큰 강을 끼고 있어 이씨조선 천년이

    도읍터로서 마땅한 곳이었다. 그러나 답사를 해본 결과 좀처럼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따라서 무학이 고민하고 있었는데 한 노옹이 나타나 “여기서 십리를 더

     

    가면 스님이 찾는 곳이 나타나리라“하고 가르쳐 주었다. 그 말을 쫓았더니 지금의

    삼각산아래 광화문 일대에 이르렀다. 무학대사는 과연 왕성(王城)의 땅이라 감탄

    하고 “다만 앞에 관악산이 있어 화기(火氣)의 침노가 있다”하고 새 왕궁에 화신을

     

    구축하는 한 쌍의 해태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리고 노옹이 가르쳐준 곳, 십리만 더

    가면 이상적인 대궐터가 발견되리라는 고사가 있어 이곳을 왕십리(往十里)라 불렀

    다는 것이다. 아무튼 태조는 이듬해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1394년 도읍을 한양

     

    으로 옮겼다. 태조는 왕조를 세울 때 사람도 많이 죽였지만 고려의 구신(舊臣)을

    쓰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서견(徐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서견은 이천(利川)

    사람으로 충렬왕 때 등과하여 공양왕 때 사헌부 장령(掌令)이었다. 그는 대사헌

     

    강희(姜淮)와 더불어 이성계파인 정도전, 조준을 맹렬히 공격했다. 그리고 정몽주가

    암살되자 김진양(金震陽) 등과 귀양을 갔고, 그 뒤 금천(衿川=시흥)에 살며 두 임금

    을 섬기지 않겠다는 절조를 지켰다. 그리고 시를 지었는데, 千載神都隔渺茫 忠良濟

     

    濟佐明王 統三爲一功安在 却恨前朝業不長 <천년의 사직을 누려온 도읍이 멀리

    떨어져 아득하고 가물가물 하구나, 충성스럽고 현량한 신하들이 많이 있어 밝으신

    임금을 보좌했건만, 셋을 합쳐 하나로 만들었으니 공이 절로 있어 무사 할 테지,

     

    그러나 전조(前朝)의 한을 망각코자 하노니 이는 어떤 일이든 결코 영원함은 없기

    때문이다.> 이 시를 전해 듣고 아첨하는 신하들은 무슨 역적모의나 발견한 듯이

    그를 죄수라고 벌떼처럼 일어났다. 태조는 마음속으로 불쾌했으나 “고려조의 신하

     

    가 그 임금을 잊지 않고 시를 지어 사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우리 이씨

    가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이 자리를 누릴 것인가, 만일 이씨가 망한 뒤 이씨를

    사모하는 신하가 있다면 얼마나 기쁘고 가상한 일인가, 버려 두어라“하고 나무랐다.

     

    여덟 아들 중 태조는 계비인 강씨를 총애하였고 그의 소생인 방번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배극렴, 조준 등이 “방번 왕자는 난폭하여 도저히 대통(大統)을 잇지

    못할까 합니다. 꼭 강씨 소생을 세자로 삼으시겠다면 차라리 방석왕자를 책봉하십

     

    시오“하고 아뢰었다. 태조도 이를 받아들여 방석을 세자로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한씨 소생의 여러 왕자들의 불만이 대단했다. 특히 방언은 아버지의 창업을

    도운 공로가 가장 클 뿐 아니라 사병(私兵)도 많이 거느리고 있어 그 세력이 강대

     

    했다. 태조 7년(1389) 8월 방원이 이른바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남은(南

    誾)은 의령(宜寧) 사람으로 공민왕 때 정몽주의 당인 김진양에 의해 탄핵되고 조준,

    정도전, 윤소종 등과 멀리 귀양을 갔으나 성계가 득세하자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방석이 세자가 되자 남은은 정도전과 이를 편들었는데

    방원이 난을 일으키자 정도전과 함께 남은도 참살되었다. 그리고 방원은 배다른

    동생이나 방번, 방석까지 죽이는 골육상쟁을 벌였던 것이다. 태조는 이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크게 분노하고 왕위를 한씨 소생의 둘째 아들인 방파에게 물려주고 함흥

    으로 가벼렸다. 이리하여 제 2대 정종(定宗)이 섰던 것이다. 태조는 불도에 귀의

    하고, 이때 이지란도 태종을 호종했다. 본디 이지란은 그 아내가 방번, 방석의 생모

     

    인 강비(康妃)의 조카딸이었으므로 그가 조정에서의 영화를 버린 것도 당연했다.

    여진족 출신의 이 맹장도 머리를 깍고 출가했으며 만년에는 오직 불제자로 염불삼

    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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