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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석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15. 00:31
흥망이 有數하니 滿月臺도 秋草로다
五百年 王業이 牧笛에 부쳐시니
夕陽에 지나는 客이 눈물겨워 하드라
<해설>
흥하고 망하는 것이 다 운수가 있는 것이어서 그 옛날 화려했던
대궐인 만월대도 가을풀이 우거져 쓸쓸하기만 하다. 오백년의 사직을
이어 내려 온 빛나는 왕조의 자취도 이제는 구슬피 들려오는 목동의
피리소리에 깃들어 있을 뿐이니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해를 바라
보며 길을 재촉하는 나그네 심정에도 오직 슬프고 안타까울 뿐이다.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턴고
굽은 절이면 눈 속에 푸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은 너 뿐인가 하노라.
<해설>
무거운 눈에 축 휘어진 대나무를 보고서 그 누가 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굽은 절조라고 한다면 대나무가 눈 속에 어찌 변함없는 푸르름을 간직할 수
있겠는가 뭐니 뭐니 해도 모진 겨울의 추위를 견뎌낼 만한 절개를 가진 것은
대나무 너 뿐인가 하노라.
~원천석~
◈ 배경
이성계는 그에게는 인재가 있었다. 특히 다섯째 아들인 방원(芳遠)과 이지란
(李之蘭)은 그의 대업을 잘 도왔다. 이지란은 보디 여진의 추장 아라불화(阿
羅不花)의 아들로서 두란첩목아(豆蘭帖木兒)라는 이름이었다. 성계가 자라난
영흥 지방은 여진족의 고장으로서 성계는 이 추장의 아들과 의형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부하를 이끌고 성계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공민왕 13년 성계는
여진의 삼선, 삼개를 무찔러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이어서 공민왕
14년 노국대장공주가 난산(難産)으로 세상을 떠나자 총명하던 공민왕도 암군(暗君)이
되고 말았다. 신돈(辛旽)은 이름이 편조(遍照)이고 자는 요공(耀空)이라 하였는데
계성현(桂城縣 ) 옥천사(玉川寺)에 딸린 여종의 아들로 태어났다.
노국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신돈을 중용하고 궁중에 불러들여 정사를
맡겨버렸다. 신돈은 일반적으로 요승이라 불리나 전제개혁(田制改革)과 노비
를 해방시키는 등 괄목할만한 정책을 썼다. 그러나 음탕한 소행과 방종은 당
시의 사대부들의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리게 됐다. 그래서 마침내 왕을 시해
하려는 음모까지 꾸몄으나 발각되어 공민왕 20년에 주살 되었다. 한편 최영
은 공민왕 14년 교동과 강화를 노략질한 왜구를 크게 무찔렀으며 동서강도지
휘사(東西江都指揮使)로 있다가 신돈이 주살되자 찬성사가 되었다. 공민왕
은 신돈이 죽고 나서 얼빠진 사람처럼 되었는데 궁중에 자제위(子弟衛)라는
걸 두어 미소년들을 모았다. 이 미소년 중 홍륜이란 자가 익비(益妃)와 간통
을 하고 임신까지 시킨 불상사가 일어났는데 공민왕 23년 9월 내시 최만생이
왕을 시역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최만생이 홍륜과 익비가
간통하여 임신 5개월이 되었다는 보고를 하자 왕이 오히려 노하고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 했으므로 겁을 먹은 최만생은 홍륜, 전진, 홍관,
한안, 최선 등과 공모하여 왕의 침전에 들어가 왕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