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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15. 09:20
仙人橋 나린물이 紫霞洞 흐르로니
반천년 왕업이 물소리 뿐이로다
아히야 고국흥망을 무러 무삼하리오
~정도전~
<해설>
선인교 아래 흐르는 물이 자하동을 지나가는데 따지고 본다면
오백년의 왕업도 저 물소리만 남겼구나, 그러니 지나간 고려의
흥망을 물어 무엇 하겠는가.
◈ 배경
우왕 14년 최영을 죽인 이성계 일파는 우왕도 협박하여 강화도로 추방했다.
이때 가장 활약했던 것이 이방원이었다. 원래 이성계는 한씨(韓氏) 부인과
강씨(康氏) 부인 둘이 있었는데 아들을 모두 여덟 명이나 두었다. 한 씨 부인
소생으로는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의 여섯 형제가 있고 강씨 부인
소생으로는 방번, 방석의 형제가 있었다. 우왕을 축출한 이성계는 곧 조민수와
충돌을 일으켰다. 조민수는 우왕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자 했고 성계는 왕실
중에서 고르자고 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도 왕실을 따르는 신하가 많았으므로
조민수의 주장대로 우왕의 아들을 세웠는데 바로 창왕(昌王)이다. 조민수는
좌시중(左侍中)이 되고 권력을 일단 장악했으나 이성계 일파로 대표되는 신흥
세력에는 어차피 밀리는 운명에 있었다. 즉 조민수를 비롯한 사람들은 옛것을
그대로 지키려는 보수파요 늙은이들이었지만 이성계 주위에 몰려든 인물들은
젊은이였고 일종의 혁신파였다. 특히 조준(趙俊;1346~1405)은 평양사람이고
자를 명중(明仲), 호를 송당(松堂) 또는 우재(吁齋)라고 하였는데 조민수 공격의
선봉에 나섰다. 이때 조준은 대사헌(大司憲)이었는데 이성계, 정도전 등과 더불어
사전(私田) 개혁운동을 일으켜 이것을 방해했다는 죄로 조민수를 몰아붙였던
것이다. 여러 번 상소문을 올리자 이때 수상으로 있었던 이색(李穡)은 상을 찌푸
리며 “경솔히 옛날 법을 고치지 못한다.”하고 반대했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의
세력은 워낙 강했고 마침내 조민수는 고향인 창녕(昌寧)으로 추방되었다가 1389년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