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변계량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15. 18:42

    내해 좋다 하고 남 슬흔 일 하디 말며

    남이 한다 하고 義아녀든 좃디 마라

    우리는 天性을 딕히여 삼긴 대로 하리라

                   ~변계량(卞季良;1369~ 1430)~

    <해설>

    나에게 하기 좋다고 남에게 싫은 일을 하지 말며, 또 남이 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의로운 일, 옳은 일이 아니거든 따라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타고난 근본 된 성품을 지키며 나 생긴 그대로 하리라.


    ◈ 배경

    공민왕 4년 정몽주가 암살되자 이성계 일파는 공민왕을 원주로 추방시키고 이성계를

    새 왕조의 왕으로 추대했다. 이 주동인물은 정도전, 조준, 배극렴의 세 사람이었다.

    먼저 조준은 개국 일등 공신으로서 우시중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고 오도 병마를

     

    통솔했다. 뒷날 태종이 서자 영의정이 되었으며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도전

    은 봉화(奉化) 사람으로 자를 송지(宋之)라 하였고 호는 삼봉(三峰)이다. 그는 목은

    이색에게 글을 배웠고 정몽주, 이숭인, 이존오, 김구용, 김제안, 박의중, 윤소종 등이

     

    모두 가까운 친구였다. 이존오는 구름이 虛浪하다/中天에 떠 이셔 任意로 다니면서/

    구타야(굳이) 광명(光明)한 날빗츨 따라가며 덮느니라. 시조를 남기고 있지만, 꿋꿋

    한 성미의 사람이었다. 특히 공민왕 15년 정언(正言) 벼슬로 있을 때 신돈이 국정을

     

    장악하자 이를 공박하는 상소를 올렸고, 신돈이 왕과 함께 앉는 것을 보고 면박하다

    가 왕의 진노를 불러 일으켜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풀려나와 공주(公州) 석탄(石灘)

    숨어 살았는데 31 세로 병사하였다. 또 이숭인은 성주(星州) 이씨로서 자는 자안

     

    (子安)이고 호는 도은(陶隱)인데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다. 정도전과 함께 수학했지만

    이씨 왕조가 들어서자 정몽주의 당이라 하여 영남으로 귀양을 갔는데 매맞아 죽었다.

    도전이 그를 시기하고 미워했기 때문이다. 김구용은 저 유명한 김방경의 증손으로서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18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좌사의대부(左司議

    大夫)가 되어 우왕의 실덕을 바른 말로 간하였으며 고려말 명나라의 사신으로 갔다가

    주원장의 비위를 거슬러 그곳에서 죽었다. 또 박의중은 생몰연대가 불명하나 밀양

     

    박씨로서 자는 자허(子虛), 호는 정재(貞齋)였다. 일찍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철령위(鐵嶺衛)를 반환하라고 요구했고, 당시 고려말 관기가 문란하여 명나라에

    가는 사신들이 장사를 일삼는자가 있었는데 박의중은 한 푼의 물품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그 사신 도중 요동의 관리 서현이란 자가 뇌물을 요구하자 가진 것이 없다,

    하면서 입고 있던 모시옷을 벗어 주었다고 한다. 이때 서현도 감탄하여 청렴함을 상부

    에 보고 했으므로 명나라 황제 주원장도 그를 환대하고 철령위 문제를 철회하였다.

     

    윤소중은 무송(茂松) 사람으로 자를 헌숙(憲叔)이라 했고 호는 동헌(桐軒)인데

    이씨 조선이 되자 병조판서로 벼슬했다. 이렇듯 정도전의 교우(交友)로 당대의 명신,

    선비들이었는데 그는 고려 공민왕 때 등과하여 성균사예(成均司藝)로서 그 문명이

     

    높았다. 이인임의 미움을 받아 잠시 회진으로 귀양을 갔으나 후에 정몽주의 서장관

    (書壯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었고 돌아와서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그리고 이성계

    와 더불어 공양왕을 옹립하여 충의군이 되었다가 다시 조준 등과 같이 성계를 추대

     

    하여 개국공신 봉화백에 삼도통제사가 되었다. 그리고 새 왕조 초기의 관제 등을 제정

    하였다. 배극렴은 성주(星州) 사람으로 자는 양가(量可)이고 호는 필암(筆菴)이었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차츰 올랐고 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성산군(星

     

    山君)이 되었다. 그리고 양주 별궁을 짓는데 공이 많았으나 새 왕조가 들어 선 해에

    병사하였다. 어쨌던 왕씨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자 벼슬을 버리고 산속에

    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망망 대해로 배를 타고나가 행방불명된 사람도 있었다.

     

    변계량은 밀양 사람으로 자를 거경(巨卿)이라 했고, 호는 춘정(春亭)이다. 그는

    포은 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7세에 등과하여 전교, 주부를 역임, 태종 때에

    예조 참의를 거쳐 대제학에 올랐다. 명나라의 문서는 그의 손을 거쳐서 수정되었다. 

     

    '한 자 > 한시(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석린의 시  (0) 2009.03.15
    조준의 시  (0) 2009.03.15
    정도전의 시  (0) 2009.03.15
    원천석의 시  (0) 2009.03.15
    길재의 시  (0) 2009.03.14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