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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한 자/지혜로운 한자 2010. 2. 5. 10:48
風水
(바람 풍, 물 수)
八字가 시간에 대한 調和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라면 風水는 공간에 대한 調和의
결과다. 八字가 天時와 관계가 있다면 風水와 관계있는 것은 地理(지리)다.
사람의 위치는 땅의 陰陽五行(음양오행)과 맞아야 한다고 보았으며 그것을 調和
있게 하기 위해 風水가 나왔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科學(과학)이 발달한 지금
까지도 집이나 조상의 묘터, 공장, 심지어는 사무실의 집기 위치까지도 風水를
고려하여 배치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연과 調和되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後孫
(후손)에게도 복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바람과 물로 표시
했을까? 周易(주역)에 보면 바람과 물이 결합되어 있는 澤風大過卦(택풍대과계)가
있는데, 마치 砂上樓閣(사상누각)처럼 기초가 튼튼하지 못해 아주 위태로운 형상을
뜻한다. 연못 위에 바람이 거세게 부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죽은 사람은
生氣를 타야 하는데, 生氣(생기)는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추게
된다.’ 그러니까 生氣가 흩어지지도 않고, 한곳에 멈추지도 않게 하기 위해서는
風水를 피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정확한 記錄(기록)은 없지만 우리나라는 三國時代
(삼국시대)부터 風水를 믿었던 듯하며, 고려시대에 와서 정착되어 커다란 영향력을
行使(행사)하게 된다. 고려 태조 王建(왕건)의 訓要十條(훈요십조)는 그 대표라 할 수
있으며, 조선의 李成桂(이성계)는 都邑(도읍)을 정하는 데 風水說(풍수설)을 따랐다.
風水는 한동안 잠잠하다가 요즈음에 와서 다시 盛行(성행)하는 것 같다. 꼭 迷信(미신)
이라고 외면하는 것도 옳지 않겠지만 盲信(맹신)하는 것 또한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사실 옛날 중국의 경우를 보면 風水를 믿지 않았던 天子도 많았다. 隋煬帝(수양제)
楊廣(양광) 때의 일이다. 어떤 이가 祖上의 묘터가 좋다고 하자 버럭 화를 냈다.
“이놈아, 묘터가 불길했다면 내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테고, 좋았다면 내 동생이
戰死(전사)하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宋나라의 奸臣(간신)으로 유명했던 蔡京(채경)은
風水狂(풍수광) 이었다. 巨金(거금)을 주고 錢塘江(전당강) 옆에 있는 明堂(명당) 자리를
사서 祖上의 묘를 썼지만 후에 罷職(파직) 당하고 집안이 風飛雹散(풍비박산) 당했다.
반대로 自治通鑑(자치통감)을 쓴 宋나라의 司馬光(사마광)은 風水反對論(풍수반대론)
자였다. 그는 風水에 따르지 않고 祖上의 묘를 썼지만, 代代孫孫(대대손손) 가문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