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영수의 추억쉼 터/잠깐 쉬며.. 2009. 12. 18. 10:55
한국적 퍼스트레이디의 원형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꼿꼿이 앉아 문세광의 총탄을 맞은 그녀는 그날
오후 7시쯤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박정희는 먼저 간 아내 육영수를 그리며 詩 한 수를 지었다.
‘추억의 흰 목련
유방천추(遺芳千秋)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산천초목도 슬퍼하던 날
당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겨레의 물결이 온 장안을 뒤덮고
전국 방방곡곡에 모여서 빌었다오.
가신 님 막을 길 없으니
부디 부디 잘 가오 편안히 가시오.
영생극락하시어,
그토록 사랑하시던
이 겨레를 지켜주소서
불행한 자에게는 용기를 주고
슬픈 자에게는 희망을 주고
가난한 자에는 사랑을 베풀고
구석구석 다니며 보살피더니
이제 마지막 떠나니
이들 불우한 사람들은
그 따스한 손길을
어디서 찾아 보리
그 누구에게 구하리
극락천상에서도
우리를 잊지 말고
길이길이 보살펴 주오
우아하고 소담스러운 한 송이
흰 목련이 말없이
소리 없이 지고 가 버리니
꽃은 져도 향기만은
남아 있도다.
당신이 먼 길을 떠나던 날
청와대 뜰에 붉게 피었던 백일홍과
숲속의 요란스러운 매미소리는
주인 잃은 슬픔을 애닯아 하는 듯
다소곳이 흐느끼고 메아리쳤는데
이제 벌써 당신이 가고 한달
아침 이슬에 젖은 백일홍은
아직도 눈물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매미소리는 이제 지친 듯
북악산 골짜기로 사라져가고
가을빛이 서서히 뜰에 찾아 드니
세월이 빠름을 새삼 느끼게 되노라
여름이 가면 가을이 찾아오고
가을이 가면 또 겨울이 찾아오겠지만
당신은 언제 또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한번 가면
다시 못 오는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아 이것이 천정(天定)의 섭리란 말인가
아 그대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
박정희와 육영수가 처음 만난 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부산 피난 시절이었다..
육영수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1년 후배이자 부관이었던 송재천의 중매로 부산 영도다리 옆
작은 식당에서 처음 만났다. 육영수는 그 자리에서 박정희를 마음에 심었다. 그 만큼 육영수는
단호함과 분명함이 박정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 후 두 사람은 50년 12월 12일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혼례를 올렸다.
결혼 당시 갓 중령 계급장을 단 박정희는 34세로 재혼이었고 배화여고를 나와 옥천여학교
선생을 하던 육영수는 26세의 초혼이었다. 그 두 사람의 결혼은 조촐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됐다. 육영수는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옥천 출신이고 죽향초교 대선배이기도 한 천재 시인 정지용도 49세에 세상과 하직했다.
'향수'(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박정희 가족 특히 박근혜에게 육영수란 정말 ‘꿈에들 잊힐 리야’ 하는 존재다.
그녀는 박정희의 딸이기 전에 육영수의 분신이었다. 그래서 23세 나이에 죽은 엄마를
대신해 일국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감당했다. 남들이 길게 풀어헤친 머리에 청바지를 입고
활보할 때 그녀는 머리를 틀어 올리고 한복을 차려 입은 채 아버지의 텅 빈 한 켠을 채워야 했었다.
그 일을 5년씩이나 했었다. 육영수는 38세에 청와대에 들어가 12년 동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단단히 해냈다.
역대 퍼스트레이디들이 선망과 시기를 동시에 느낄 만큼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신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육영수는 굳이 신화로 채색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따뜻하고 정감 어린 인간이었다.
정진홍 논설위원(중앙일보) 사진, 詩~네이버
'쉼 터 > 잠깐 쉬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수신문 올해의 사자성어 '旁岐曲逕' (0) 2009.12.26 꿰매고 싶은 입 (0) 2009.12.26 음주술법(飮酒術法) (0) 2009.12.03 땅에도 역사가 있다 (0) 2009.11.13 미국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0) 2009.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