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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일탈/가보고 싶은 곳 2009. 9. 1. 22:12
사람들은 구례하면 가장 먼저 산자수려한 자연 경관부터 떠올린다. 민족의 영산으로 백두대간의 중심에 우뚝 선 지리산이
그렇고, 온갖 희노애락, 민초들의 갖가지 사연을 감싸안은 채 오백 리 물길을 말없이 곱돌아드는 섬진강이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이 곳곳에 뿌려놓은 자연의 절경은 인간들의 자의적인 평을 거부한 채 여전히 도도하다. 또 하나, 구례를 얘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 지방 사람들의 인심이다. "구례로 들어온 사람을 굶겨 내보내는 법이 없는" 넘치는 인정은,
발빠른 행보로 나와 내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고향을, 그곳에 계신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특별함으로
다가온다.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재래장의 하나로 얘기되는 구례장에서는, 이재(理財)와 모리(謀利)의 한켠에 아직도 우리네
어린 시절의 때묻지 않은 순박함과 인간 본연의 풋풋함이 살아 있음을 본다.
험하디 험한 지리산 골골을 뒤지며 손수 채취했을 것이 분명한 나물
몇 두름을 난전에 펼쳐 놓은 노파의 후한 손대중은 되바라진 젊은 아
낙들을 머쓱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볕 드는 담벼락에 붙어서서 담배
들을 나눠피는 시골 고라리들도 물건 파는 일보다는 저들끼리의 입담
에 재미를 붙여 파장을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 어렵게 지켜온 순박한 인심
그러한 모습은 군내 곳곳에서 아주 쉽게 목격된다. 하늘 아래 첫동네
라는 지리산 심원마을(해발 750미터)은 그 허명 때문에 들고나는 사람
들이 많은 곳. 그래서인지, 산골마을 특유의 순박함이나 정겨움따윈 찾아볼 수 없고, 거의 대부분 가구(전체 16가구 중 14곳)
들이 식당이나 민박 간판을 내걸고 있는 다소 생경한 모습이었다.
"마을이 망가졌다고 말들을 많이 하지. 그러나 왜 망가졌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얘기를 안해.왠지 알어? 처음, 이곳이 소문나며 제법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했지. 그러나 아무도 이곳에서 자고 가려고는 안해. 첩첩
산중에 초가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무서워서 싫다는 게야. 귀신 나올것
같다고. 어째, 집을 고쳐야지. 국립공원 안이라 농사도 맘대로 짓지 못
하는데, 외지인들을 상대로라도 먹고 살려면 그네들 구미를 맞춰줘야
쓸거 아녀. 그래 이렇게 됐어. 그런데 이제와선 동네가 못쓰게 됐다고
혀들을 차. 그래도 우리 마을이 아직 인심은 안 변했어. 주민들 모두가
이를 악물고 시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덕분이지.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어?"
심원마을에서 서른여덟 해를 살았다는 김용순 할아버지는 탄식조로
시속의 간사함을 꼬집는다. 이제 나이 들어 영감 할마시 두 양주(兩主)
가 한봉치고 고로쇠물이나 받아다 팔면서 근근히 살아가지만, 그이는
한평생을 '노력한 만큼만 먹고 살아온 것'이 마냥 떳떳하다는 투다.
그이 뿐이랴. 토종 음식을 파는 '심원 숲속의 집' 안주인도 차 한 잔
마시자는 길손들에게 당귀차를 내놓곤 "그걸 어떻게 돈 받고 파냐"며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 내세우지 않는 자연의 넉넉함
그러한, 때묻지 않은 순박함과 작은 집착마저 놓아버린 후덕함은 지리산 전체를 관류하는 큰 흐름이다. 세속에 물든 영악한
인간들은 영산의 허리를 반으로 갈라놓으며 자신들의 편리를 극대화하였지만, 산 밑자락을 도려내 '지리산 온천랜드'란 가당
찮은 위락 단지를 조성하기도 했지만, 산은 그 모든 번뇌를 껴안고도 아직 넉넉하다. 마침 정월 보름 직후의 휴일을 맞은 화엄
사 대웅전(보물 제299호)과 각황전(국보 제67호)에는 뭇중생들의 비원이 빗발친다. 국보(제35호 4사자 삼층석탑, 제12호
각황전 앞 석등)와 보물(제132호 화엄사동오층석탑, 제133호 화엄사서오층석탑)로 지정된 여러 구조물 주변에도 탑돌이 하는
아낙들의 줄이 끊일줄 모른다. 거개가 개인의 신상발복을 빌고 있을 터이지만, 그래도 대가람은 그 모든 이기를 포용의 큰 가슴
으로 감싸 안고도 침묵으로 일관이다.
달관의 경지는 하동까지 물길 팔십 리를 휘도는 섬진강에서도 마찬가지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라북도 진안에서 발원하여 수많은 골과 들을 적시며 흐르는 섬진강이
비로소 큰 강의 면모를 보이는 곳이 바로 구례 어름. 아직까지도 청류(淸流)를 자랑
하며 유유히 흐르는 섬진은 쌍계사 초입인 화개에 이르러 노고단에서 흘러내려온
서시천과 합수하며 강폭을 넓힌다. 화개는 유행가 노랫말로 더욱 유명해진 곳.
전라남도 구례군 간접면 운천리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가 강을 사이하
고 마주보고 있는 이곳은 노랫말처럼 경상도와 전라도를 하나로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하는 곳으로, 해마다 봄이면 쌍계사까지 터널을 이루는 벚꽃 십 리 길의
장관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개화도
이르고 그 이름 높던 화개장터도 서질 않으니(개시를 준비중이다), 아직은 기세가
등등한 삭풍만이 골을 훑고 내려와 강심을 뒤흔들 뿐이다. 지리산을 등지고 섬진
강의 청류를 바라보며 자리한 이 일대에는 너른 들을 따라 제법 규모를 갖춘 촌락
들이 들어서 있는데,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같은 곳이 대표적인 마을. 박경리 선생
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기도 한 이곳은, '무딤이들' 같은 광활한 토지 덕분에
자신만 부지런하면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을 받지 않는 풍요의 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디라고 다를까. 평사리에도 젊은이
들 빠져나간 빈 자리를 환진갑 다 지낸 늙은이들만이 외롭게 지키고 있어 예전같은 활기는 좀체 찾아볼 길이 없다.
♣ 풍요의 원천은 '변화 없음'이다
악양면 평사리에는 한산사라는, 세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조그만
사찰이 하나 있는데, 절집은 소박하고 볼품이 없으나 일주문만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어 눈길을 끈다. 보통의
일주문이 거대한 기둥에 화려한 단청으로 세인들을 위압하는 것에 반해,
한산사의 그것은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거대한 암석이 갈라진 틈으로
난 좁은 길로 구성되어 있어 오히려 '해탈문'으로 명명하는 것이 타당할
듯 싶기도 하다. 아무려나, 지리산은 하동으로 내려가며 그 끝을 사리고,
섬진강은 광양을 거쳐이내 바다로 흘러든다. 이제 곧 산천은 벚꽃이며 산수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매화로 뒤덮일 것이다.
그때쯤이면 섬진강엔 은어가 뛰고, 덩달아 은어나 제첩을 잡는 어부들의 손길도 부산해질 터. 하지만 바빠지는 것은 인간사
속세의 일일 뿐이다. 지리산과 섬진강은 앞으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킬 따름이고, 넉넉한 남도의 인심과 풍류도 당분
간은 그대로 유지될 전망이다. 그것이 이 고장을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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