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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일탈/가보고 싶은 곳 2009. 8. 31. 17:46
매생이를 처음 맛본 것은 불과 5년 전 장흥을 취재 차 찾았을 때다. 길라잡이를 맡은 어느 시인이 꼭 먹어봐야 할 것이 있다며
한 식당으로 팔을 이끌었는데 처음 보는 국이 나왔다. 하얀 국그릇에는 파래처럼 생긴 풀이 담겨 있었다. 시인은 매생이국이
라고 했는데 흐물거려서 숟가락으로 잘 떠지지도 않았다. 차라리 훌훌 마시는 편이 나았다. 그 뒤로 매생이국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맛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밍밍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러던 중, 지난해 겨울 장흥으로 다시 취재를 갈 기회가 생겼다. 소설가
이청준과 한승원 등 장흥 출신 문인들의 행적을 더듬는 문학기행 기사를
위해서였다. 장흥에 도착하자 취재는 뒤로 하고 다짜고짜 매생이를 맛보러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뜨끈한 매생이국을 한 술 떠서 입 안에 넣는 순
간, 아! 가득 퍼지는 향긋한 갯내음이란. 천길 바다 속의 깊고 깊은 맛이 밀
려드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이 맛을 모르고 있었다니! 안도현 시인이 <사
람>이라는 산문집에서 매생이를 두고 말했던 “남도의 싱그러운 내음이,
그 바닷가의 바람이, 그 물결 소리가 거기에 다 담겨 있었던” 바로 그 맛이
었다. 매생이는 장흥, 완도, 고흥, 강진, 해남 등 남해안의 맑은 바닷가에서
난다. 12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채취할 수 있는데 파래보다 올이 훨씬 가늘
다. 사실 매생이는 십수 년 전까지 ‘잡초’였다. 김을 양식하던 주민들에게는
매생이가 그저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김발에 매생이가 올라붙는데, 매생
이가 섞인 김은 절반 값도 못 받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매생이가
김과 자리 바꿈을 했다. 남도 사람들은 매생이를 주로 국으로 끓여 먹었다.
옛날엔 돼지고기와 함께 끓여 먹었다는데 요즘은 주로 굴을 넣어 끓인다.
방법은 간단하다. 매생이를 민물에 헹군 다음 한 컵 정도의 물을 붓고 굴과
다진 마늘 등을 넣어 끓인다. 간은 소금이나 조선간장으로 한다. 주의할 것
은 한 번 끓어오르자마자 바로 불을 꺼야 한다는 것. 오래 끓이면 매생이가 녹아 물처럼 되기 쉽다. 그런 다음 참기름 한 두 방
울과 참깨 따위를 곁들이면 된다. 한번 끓인 매생이는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시원하게 먹어도 별미다. 술 마신 다음날 해장국
으로도 좋다. 술이 덜 깬 아침, 매생이국을 한 그릇 후루룩 들이키면 어지간한 숙취는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매생이국 한 그릇으로 속을 데웠다면 장흥 여행에 나서보자. 장흥은 예로부터 문림의향(文林義鄕)으로 불리는 곳. 소설가
이청준과 송기숙, 한승원, 이승우 등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장흥의 하늘과 들판, 기름진 개펄을 소재로 작품을
썼다. 천관산 중턱에는 이들을 기념하는 문학공원이 있다. 회진은 문학도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이청준 생가와 한승
원 생가가 지척이다. 고만고만한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는 포구의 모습은 평화롭고 한적하다. 회진포에서 소설가 이청준이
태어나고 자란 진목리가 가깝다. 이청준은 이 일대 어촌마을의 정서를 바탕으로 ‘선학동 나그네’라는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은
‘천년학’이란 제목으로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고 있다. 임권택 감독이 1996년 영화 <축제>를 장흥 남포마을에서 촬영하
기도 했다. 마을 앞에는 ‘소등섬’이라는 무인도가 신기루처럼 떠 있다. 영화 촬영 이후 남포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하나 둘 늘
어났고, 굴 구이가 맛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꽤 알려진 관광지가 되었다. 강진 가까운 삭금마을은 일몰 명소다. 사진작가들만
알음알음 찾는다. 포구에 정박한 작은 어선들 너머로 시뻘겋게 떨어지는 일몰이 장관이다. 매생이가 자라는 맑은 바다가 있
고 문학의 짙은 향이 서려 있는 장흥. 이 겨울이 다 가기 전 한 번쯤은 가볼 만하지 않을까?
기아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