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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마장 아야기..
    쉼 터/잠깐 쉬며.. 2009. 8. 20. 21:11

     

    7월 어느 일요일, 이 공간에는 십육만 팔천 칠백 십삼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 간혹 가족과 연인들도 눈에

    띄었으나, 대부분은 혼자 아니면 친구 사이인 것 같았다. 오전 열한시를 전후해 이들은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사들처럼

    결연한 자세로 이 공간에 들어섰다. 표정은 매서웠으며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십육만 명이 넘는 군중들을 초대한 공간,

     

    그곳은 바로 경마장이다. 경마장은 말 그대로 말들이 경주를 벌이는 공간이다. 적게는 일곱 마리에서 많게는 열네 마리의

    말들이 스타트 총성과 함께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당연히 이들 말들 중에는 잘 뛰는 말이 있고 잘 못 뛰는 말이 있다.

    그런데 말들만 경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이들 말들과 호흡을 맞추며 골인지점까지 함께하는 기수들도 경쟁을 벌인다.

     

    이 공간에서는 ‘마칠기삼(馬七騎三)’이라는 공식이 있다. 즉, 경마의 승부는 말의 능력 70%, 기수의 능력 30%로 가름된다는

    공식이다. 따라서 승부의 결과는 예측하기가 무척 어렵다. 열한시 반, 첫 경주가 시작됐다. 첫 경기가 시작되기 전 사람들은

    경주를 예상하고, 또 예상했다. 이 예상에 투자하는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경마는 단순한 승부가 아니라 돈이 걸린 승부

     

    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출전하는 말의 습성부터 훈련 상태, 심지어는 몸무게의 변화까지 열심히 체크했다. 이어 자신이

    선택한 말에 돈을 걸었다. 열두 마리의 말이 승부를 벌인 첫 경주에서 인기순위 1위의 말과 3위의 말, 그리고 12위의 말이

    각각 일, 이, 삼등을 차지했다. 말이 골인지점을 통과하자 함성과 탄식이 교차했다. 순위를 맞춘 사람들과 맞추지 못한

     

    사람들의 희비의 경계였다. 그런데 인기순위 12위의 말이 3위로 들어온 것은 의외의 결과였다. 연승식(3위 안에 들어오는

    말을 선택할 경우 이에 해당하는 배당금을 돌려주는 경주방식)에서 29.4배라는 높은 배당이 나왔다. 이 말에 천원을 걸었

    다면 이만 구천 원을 돌려받게 된다. 만약 만원을 걸었다면 이십구만 구천 원, 십 만원을 걸었다면 이백구십구만 원을 돌려

     

    받게 된다. 이 공간에서는 여기서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이만 구천 원은 욕심 없는 돈이다. 그러나 이백구십구만 원은 욕심

    나는 돈이다. 역으로 천원은 작은 돈이다. 그러나 십 만원은 부담 가는 돈이다. 작은 돈으로 욕심 없는 돈의 행운을 맛 볼

    것인가, 아니면 부담 가는 돈으로 욕심나는 돈의 행운을 맛 볼 것인가에 관한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첫 경주에 사람들이

     

    건 돈은 모두 이십억 팔천 칠백 칠십 칠만 칠천 칠백 원이었다. 이 이십억 여원의 돈을 놓고 사람들은 관중석에서 경쟁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제로섬 게임은 아니었다. 이십여 억 원의 돈 가운데서 약 30%를 주최 측에서 미리 떼어놓았으니

    관중석으로 되돌아오는 돈은 나머지 70%인 십오억 원 정도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첫 경주부터 대략 육억 원의 돈을 잃고

     

    하루의 경주를 시작한 것이었다. 비록 첫 경주에 실패한 사람이어도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첫 경주가 끝났을 뿐이었다.

    앞으로 열 경주가 더 남아있었다. 두 세 경주만 맞추면 된다. 두 세 경주만 맞추면 본전뿐만 아니라 일주일 용돈, 더 크게는

    한 달의 용돈도 벌 수 있다. 하지만 경주를 맞추기란 앞서 말했듯이 어려운 일이다. 물론 잘 뛰는 말에 돈을 걸면 맞출 가능

     

    성은 크다. 그러나 그 배당이란 1.2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천원을 걸면 고작 이백 원만 버는 형국이다. 그러니 이천 원

    이라도 벌려면 만원을 투자해야 한다. 한데 그 말이 입상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입상하지 못하면 만원은 고스란히 공중에서

    산화하고 만다. 그래서 좀 큰 배당에 돈을 걸면 그 말은 여지없이 등외로 밀려나고 만다. 경주가 거듭될수록 사람들의

     

    표정에는 여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본전 생각이 간절한 듯싶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는 배팅

    액에 그대로 투영됐다. 첫 경주의 배팅 액은 이십여 억 원이었지만 마지막 경주의 배팅 액은 그 두 배가 훨씬 넘는 오십팔억

    팔천오백오십만 삼천 팔백 원이었다. 마지막 경주에서 마지막 승부를 거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모든 경기가 끝났다. 누구는

     

    마지막 경주에서 본전을 찾았고, 재수 좋은 누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돈을 벌어놓았다. 또 누구는 돈을 다 잃어 허탈한 듯

    자리를 뜨지 못한 채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 공간에서 벗어나자 사람들은 서서히 이성을 되찾는 것 같았다.

    오늘 이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이 날 하루 이곳을 찾은 십육만 팔천 칠백 십삼 명이 말과 기수에게 건 돈은

     

    사백십오억 칠천사백십일만 오백 원이었다. 일인당 평균 이십오만 원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액수를 이 공간에 쏟아 부은

    것이다. 이 돈이라면 가족들과 멋진 피서를 다녀올 수 있을 텐데. 이 공간에 들어섰을 때의 매서운 눈빛은 메마른 눈빛으로

    전환됐다. 사람들이 떠난 경마장에는 예상지와 마권만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그러나 다음 주말이 오면 이 공간은 여전히

     

    전의에 불타는 눈빛을 한 이십만 인파가 운집할 것이고, 또 그들의 이성기능을 마비시킬 터이다. 일요일의 여름 석양이

    유난히 쓸쓸하게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출처 ~ 기아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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