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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업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4. 6. 21:25
벼슬을 저마다 하면 農夫하리 뉘 이시며
醫員이 炳 고치면 北邙山이 저려 하랴
아희야 盞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김창업(金昌業;1658~1721)~
<해설>
모든 사람이 벼슬을 한다면 농사를 짓겠다는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이며,
의원이 병을 모두 고친다면 북망산에 무덤이 저렇듯 많겠는가. 아이야,
잔에 술이나 가득 따라라, 나는 벼슬 따위는 생각지 않고 술이나 마음껏
마시면서 전원생활을 즐기련다.
◈ 배경
김창업은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대유(大有)이고 호는 노가재(老稼齋) 또는 석교(石
郊)라 하며 영의정 문곡(文谷) 수항(壽恒)의 아들이고 역시 영의정인 몽와(夢窩)의
아우이다. 대대로 명문의 가문으로서 서인, 즉 노론이었다. 청음 김상헌(金尙憲)이
척화파 신하로서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영의정을 추증 받은 사람이다. 청음의
형님 김상용(金尙容) 또한 병자호란 때 절사(節死)한 사람으로서 그의 아들 영북(永
北) 김광현(金光炫;1584~1647)은 자를 회여(晦汝)라 하였는데 광해군 4년 신자, 생
원과에 듣고 반정 후 연원찰방(連源察訪)으로 서 인조 원년 문과에 급제한 수재였
다. 병자화란 때에는 부제학으로서 남한산성에 호종했고 그 뒤 청주목사를 제수하
였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이조참판이 되자 이 역시 상소하여 사직했다. 이렇듯 인
품이 고결하고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에는 청나라로 가
는 국서에 일체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글씨를 또한 잘 썼으며 홍주의 홍양청
난비(洪陽淸難碑), 통진의 민기신도비 등이 그의 필적이다. 청음의 아들로선 운산거
사 광찬(光燦)이 있는데 3형제를 두었으며 모두 특출했다. 먼저 곡운(谷雲) 김수증
(金壽增;1624~1701)은 자를 연지(延之)라 하였는데 광찬의 장자이다. 효종 원년 진
사 제 2인으로 뽑혀 동 4년 사관하여 세마(洗馬)가 되었고, 벼슬이 공조참판에 이
르렀다. 그는 전서와 예서에 뛰어난 필치를 가졌고 또 문장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숙종 원년 조대비의 복제문제로 우암 송시열과 같이 유배되었고 숙종 15년 우암이
사약을 받고 죽었을 뿐 아니라 이듬해 아우인 퇴우당(退憂堂)이 적소에서 사망하자
성천부사의 직을 사임하고 춘천 곡운에 숨어 살았다. 숙종 20년 한성좌윤, 공조참
판 등으로 조정에서 불렀으나 일어나지를 않았고 시문집으로 ‘곡운집 6권’을 남겼
다. 한편 아우 퇴우당 김수홍(1626~1690)은 자를 기립(起立)이라 하고 인조 26년
사마에 장원하고 효종 7년 문과에 급제하여 동 8년 아우 문곡 김수항과 더불어 중
시에 급제하였다. 여러 청요(淸要)를 역임하고 현종 8년 호조판서가 되었는데 현종
14년 우의정을 거쳐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던 것이다. 이어 숙종 11년 윤증(尹拯)
이 우암의 문하로서 스승을 배반하고 송시열과 이율곡을 비방하자 이를 탄핵했는데
그 뒤 조대비의 복제가 그릇되었다는 남인들의 공격을 받아 제주에 유배되었고 거
기서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한편 문곡 김수항(1629~1689)은 자를
구지(久之)라 하는데 그는 독학으로 학문을 대성시킨 사람이다. 성격이 정직하였고
조금도 여기는 일이 없었는데 18세에 진사를 장원하고 23세에 알성시 제 1인으로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나이 44세에 벌써 우의정이 되었는데 벼슬이 곧이어 여의정
까지 올랐다. 숙종 초 남인 윤전(尹鐫) 등과 논쟁하다가 남해에 유배되었고 숙종 6
년 다시 조정에 들어왔는데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그러나 동 15년 원자 책봉문제
고 다시 진도에 유배되고 사약을 받았다. 이 문곡의 아들로서 김창집(金昌集)과 김
창업(金昌業) 등이 있었다. 몽설 김창집(1648~1722)은 자를 여성(汝成)이라 하였는
데 노론의 영수였고 장희빈을 둘러싼 노소 논쟁의 중심인물이었다. 남인이 물러가
고 숙종 20년 그가 영의정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소론이 노론을 적극 공격하였다.
특히 숙종 32년 그 논쟁이 극에 이르렀고, 이어 숙종이 재위 46년 만에 승하하고
경종(장희빈 소생)이 즉위하자 영조를 세사로 책봉하고 정사를 대리케 했다. 이에
유봉휘(柳鳳輝) 등 소론이 맹렬하게 공격하여 노론의 4대신을 반역죄로 몰아 극형
에 처했다. 이것이 신임사화(辛壬士禍)라는 것이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
~1708)은 자를 하중(和仲)이라 했는데 영의정 수항의 아들이었다. 그는 현종 10년
진사에 오르고 숙종 8년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지평, 대사간, 대사성을 역임하고
이어 예조판서, 대제학에 이르렀다. 아버지가 적소에서 사망하자 벼슬을 내놓고 오
직 학업에만 매진하였으며 숙종 20년 아버지의 신원(伸寃)이 확정되자 숙종께서 특
별히 기용코자 했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1)은
자를 자익(子益)이라 하는데 그역시 영의정 수항의 아들이었다. 이 사람은 시인으로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명필이었다. 70평생 시문을 위해 노력했으나 숙종 15
년 우암과 더불어 화를 입었다. 끝으로 김창업인데 그는 숙종 7년 진사에 올라 교관
(敎官)이 되었으나 벼슬하기를 싫어하고 뜻을 전원에 두었다. 그리하여 오직 원림
(圓林)의 낙을 그리워하며 동교 송계에 농토를 마련하고 화췌(花卉)로서 평생의 업
을 삼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