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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4. 4. 13:10
力拔山 盖世氣는 楚覇王의 버거이오
秋霜節 烈日忠은 伍子胥의 우히로다
千古에 凜凜 丈夫는 壽亭侯인가 하노라
~임경업(林慶業;1594~1646)~
<해설>
산을 들이 뽑을 기운과 세상을 뒤엎을 기상은 항우의 다음이고,
서릿발 같은 절개와 햇볕같이 뜨거운 충성심은 오자서보다 낫다고
감히 자부하노라, 그리고 천년만년을 두고서 늠름한 장부는 촉한의
관운장 뿐 이라고 이를 사모하겠다.
◈ 배경
임경업은 본관은 평택이고 자는 영백(英伯)인데 호는 고송(孤松)이다. 충주의 달
천평(達川坪)이란 곳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적부터 병법을 좋아하고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데 있어 명수였다. 광해군 10년 무과에 급제하여 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서대문 밖 길마재의 결전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신라 우영장(右營將)이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그는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서 백마산성을 굳게 지켜 감히
청병이 얼씬도 못하였다. 그리고 인조 16년 병자년의 설욕을 하고자 평안병사로서
군사를 움직이려고 했는데 김자점의 무고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니 향년 53세 였
다. 숙종 때 관작이 수복되고 시호를 충민(忠愍)이라 하였다. 이 시대의 이름난 학
자로서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과 계곡 장유(張維)와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을 꼽았다. 이경석(1595~1671)은 본관이 전주로서 자는 상보(尙輔)인데 원래 종실
덕천군이 6세손이었다. 인조 원년 문광에 급제하고 동 4년 중시(重試)에 장원급제
하여 벼슬이 최고인 영의정까지 오르고 기사에 선임되어 기장(丌杖)까지 하사 받았
다. 병자호란 뒤 삼전도(三田渡)에 청태종의 송덕비를 세우게 되었는데 그 비문을
처음에 장유와 조희일(趙希逸)이 지었으나 인조대왕이 이를 흡족히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득이 백헌이 지었다고 한다. 뒷날 그의 형님에게 편지를 하기를 글자를
배운 것이 후회로다 라고 썼다. 효종께서도 신임이 이만저만 깊지가 않았으며 크고
작은 일에 일일이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기암 정홍명(1592~1650)은 자를 자용(子
容)이라 했고 송강 정철의 아들이다. 그는 일찍 구봉 송익필과 사계 김장생의 문하
에서 배웠는데 광해군 8년 문과에 급제하여 숭문원에 나갔으나 당론에 의해 파직당
했다. 인조반정이 있자 다시 벼슬길에 나가 대사헌, 대제학에 이르렀다. 그는 총명
이 절인(絶人)하여 제자백가에 정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