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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종대왕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4. 4. 11:35

    靑石嶺 지나거냐 草河口 어듸믜오

    胡風도 참고 찰샤 구즌비는 므스일고

    아므나 行色 그려내여 님 계신듸 드리고쟈

                        ~효종대왕(孝宗大王;1619~1659)~

    <해설>

    이제야 청석령을 지났느냐? 그럼 초하구라는 곳은 어디쯤이뇨?

    북녘 바람은 차기도 차구나, 게다가 궂은비까지 내림은 무슨

    까닭인가? 그 누가 나의 이 초라한 모습을 그려내어 저 고국에

    계신 아바마마께 알려 드릴 것이냐!


    ◈ 배경

    인조대왕은 재위 27년으로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는데 보령이 55세였다. 모두 6남

    1녀을 두었는데 효종은 그 둘째 아들이었다. 이 시조는 효종이 봉림대군으로 겨우

    17세인 나이에 세자 소현과 함께 심양으로 끌려가던 때의 심정을 읊은 것이다.

     

    효종은 휘를 호(淏)라 했고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였다. 인조 23년 소현

    세자가 죽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억류생활 때의 굴욕을 잊지 못하여 북벌로서 그 원

    한을 풀고자 하였다. 본관이 밀양인 박노(朴魯)는 자를 노직(魯直)이라 했고 호는

     

    대호(大瓠)이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교리를 지냈다. 이이첨이

    나라 정사를 제멋대로 하자 분격하고 안동부사의 자리를 사임하였다. 그 뒤 인조

    때 호조참의가 되었으나 시기하는 자가 있어 자리를 내놓았고, 이괄의 난에서는 어

     

    가를 모시고 공주까지 갔으며 정묘호란에서는 순찰사 종사관으로서 곡식 운반에 공

    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들어가 그들의 부당한 출병을

    항의했고 화의가 이루어지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모시고 심양까지 갔다. 그러다

     

    가 병으로 귀국하여 인조 20년에는 병조참판까지 지냈다. 박황(朴潢;1592~1648)은

    본관이 반남(潘南)으로서 자는 덕우(德雨)이고 호는 유헌(儒軒)인데 그는 광해군 13

    년 정시(庭試)애 올랐고 인조반정 후 예문관, 서강원 설서,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거쳐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그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뜻이 컸으며 풍체가 또한

    당당하여 군계(群鷄) 중의 일학(一鶴)이었다. 병자호란에서는 뽑아 이들을 추격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이어 화의가 이루어져 전날의 척화를 부르짖은 신하 중 17

     

    명을 뽑아 심양으로 보내려 하였는데 그는 “안 됩니다. 일대의 명류(名類)를 뽑아

    호랑이 입에 던져 넣겠다니 아니 될 말씀입니다. 그저 한 두 사람만 보냄이 가합니

    다“라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15명이 여기서 모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자신은 왕

     

    세자를 모시고 심양까지 갔으며 돌아와서 병조판서로 있었는데 향년 52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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